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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 이순옥 증언> 꼬리 없는 짐승들의 눈빛(1) - 악마들의 소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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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번호 |
158 |
작성일 |
2008-03-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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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청지기 |
조회 |
195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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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치> 1986년 10월 26일은 내가 악마들의 소굴이라고 부르는, 함경북도 청진시 포항구역에 자리잡고 있는 농포집결소에 수감된 날이다. 일요일이라 다른 부서의 가정주부들에게는 김장을 하라고 휴식을 주었기 때문에 구내는 조용했고 찾아오는 손님들도 없었다. 물자공급소에서 책임자로 일하던 나는 다음날 상점들에 출고해야 할 상품 재정표를 만들기 위해 상업과에서 넘어온 물품구입 계산서를 놓고 품목별로 수량을 따져가며 계산을 했다. 오후에는 휴식할 작정이었으므로 계획과장에게 혹시 상부에서 전화가 오면 지시내용을 기록해 달라는 부탁까지 해 두었다. 이때 갑자기 정문 밖에서 자동차 경적소리가 요란히 울렸다. 사무실 창문을 열고 내다보니 안전부장의 차가 마당에 서 있었다. 일요일인데 또 무슨 급한 일이 있어서 찾아왔나? 창고장들이 다 휴식이니 요구하는 물건도 못 줄텐데...하는 생각을 하며 창문을 닫고 일이나 계속하자고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안전부 감찰과장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안전부장이 저 앞 길목에 있는데, 잠깐 만나 할 얘기가 있다고 하오. 같이 나갑시다. 나는 별 생각도 없이 할 말이 있으면 길에서 기다리지 말고 사무실로 올 것이지 갑자기 이건 무슨 겸손입니까?라고 물었다. 감찰과장은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고 그저 잠깐 만나면 되니 빨리 가 보자고 했다. 일하던 책상도 정리하지 않고 밖으로 나섰는데 감찰과장은 대뜸 차에 올라타라는 것이었다. 그가 차 문을 열고 등을 떠밀었지만 달리 이상하다는 생각없이 자동차에 올라앉았다. 승용차는 급속으로 달려 화물을 취급하는 역 후문으로 질주해 들어가더니 플랫폼에 급정거를 했다. 너무나 갑자기 들이닥친 일에 어안이 벙벙해진 나는 미쳐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자동차에서 내려섰다. 어느새 기차가 멈추어 서 있었다. <무리한 부탁 안 들었더니 어느 날 갑자기 잡혀가> 감찰과장 최주긴은 내 등을 무자비하게 떠밀어 열차 승강대에 올라서게 만들었다. 너무나 뜻밖의 일에 왜 이러느냐?고 소리치자 그는 내 입을 막으면서 망신당하지 않으려면 조용히 해. 올라가 보면 알게 될 거야.하고 내뱉는 것이었다. 반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열차의 침대칸까지 떠밀려 들어갔다. 내가 맡았던 간부 물자공급소장이란 직책은 각 기관의 간부들에게 각종 생필품 등 물자를 공급하는 자리다. 그러나 당시 북한의 경제사정은 예전 같지가 않았다. 1백 개의 물품이 공급돼야 할 때 80개밖에 나오지 않는 식이어서 나는 항상 골머리를 썩혀야 했다. 간부들은 서로 더 달라고 하고, 나는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게 간부들을 설득해가면서 일을 해야 했다. 그러던 1985년 가을이었다. 당시 김정일은 점퍼차림으로 공식석상에 자주 나왔다. 자연히 당 간부들 사이에서도 김정일이 입은 것과 같은 점퍼를 입는 것이 유행이 됐다. 이때 문제가 된 것이 옷감이었다. 북한에선 그런 옷감이 생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중국으로 출장을 가서 필요한 천을 사왔다. 문제의 발단은 천을 배급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안전부장(남한의 경찰서장격)이 다른 사람들은 다 한 감만 받아가는 데도 굳이 두 감을 달라며 억지를 부렸다. 나는 낯빛을 붉히지 않고 잘 달래보려고 했는데 급기야 그는 벌컥 화를 내더니 순옥이 너, 두고 보자하고는 휭하니 나가버렸다. 내가 느닷없이 안전국으로 끌려간 것은 그 일이 있은 직후였다. 혐의는 두 가지, 당 상업정책을 위반했다는 것과 국가 재산을 횡령했다는 것이었다. 기가 막혔다. 내가 결백하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데, 소가 웃을 일이었다. 더욱이 나를 체포한 것은 당의 승인도 받지 않은 채 사회안전부가 독단으로 저지른 짓이었다. 그 모두가 내게 불만을 품은 안전부장의 농간이었다. 내가 더 많은 피해를 입은 것은 그 사건이 사회안전부와 노동당 사이의 힘겨루기 양상으로 확대됐기 때문이었다. 당에서는 내가 잡혀가자 줄기차게 나의 방면을 요구했다. 그러나 사회안전부로서는 내 일이 상부까지 보고됐기 때문에, 도중에 알고 보니 이 여자가 무죄였다고 자인하면 자기네 체면을 구기게 되기 때문에 어떻게든 나를 잡아두고자 했다. 당시 65호 사건(내가 소장으로 일한 간부물자공급소를 일명 65공급소라고 불렀는데 여기서 따온 이름)은 북한내에서 일약 유명한 사건으로 알려졌다. 심지어 주민교양시간에 자료로 배포되기도 했다. <(노동)당과 사회 안전부(경찰)의 힘겨루기의 희생물이 되다> 내가 잡혀가기 전 중앙당 검열 그루빠(그룹)에서는 안전부장의 비리 사실을 적발하고 그를 인사조치하겠다고 했다. 총화 후 즉시 인사조치를 하지 않고 중간에 평양을 오르내리며 하겠다고 시한을 둔 것이 잘못이었다. 부장은 급한 김에 검열 그루빠가 다시 내려오기 전에 나에게 엉뚱한 혐의를 조작해 씌워 잡아넣음으로써 자신의 목을 지키고자 그런 일을 꾸몄던 것이다. 7시간을 더 달린 끝에 도착한 곳은 강덕역인 듯했다. 역전 홈에는 자동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자동차는 어디로 가는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한참 달린 후 큰 철대문이 달려있는 건물 앞에서 차가 멎었다. 무슨 신호를 보내자 대문이 열리면서 자동차는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차에서 내리니 창문마다 쇠창살을 댄 자그마한 2층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첫 느낌에도 감옥이구나 싶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취급당한단 말인가!> 잠시 후 한 여자가 나오더니 내 온 몸을 샅샅이 검사한 후, 시계를 풀라고 했다. 그녀는, 추운데 옷을 왜 적게 입었는가? 여기에 오면 맨바닥에서 뒹구는데 뭣 하러 좋은 옷은 입고 왔는가?라는 등 혼잣말을 중얼댔다. 그러면서 내가 어디서 큰 도둑질을 하다 잡혔는가 하는 말투로 노골적인 의심을 드러내며 나를 몰아세웠다. 나는 하루아침에 생각지도 못한 일에 휘말려 여기까지 끌려오게 된 터라 그때까지도 악몽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어리둥절해 있었다. 그 여자의 말에 제대로 부인도 하지 못한 채 시키는 대로 손목시계를 비롯한 소지품 일체를 압수 당하고 옷에 달린 단추와 지퍼까지도 모조리 뜯겼다. 행여 자해기구나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절차인듯 했다. 그제서야 가슴속에서 무엇인가가 팍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몸을 가누고 서 있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런 취급을 당한단 말인가! 난생 처음 당하는 일이라 그때 마음의 고통은 더할 수 없이 컸다. 몸수색이 끝난 후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거리며 그 여자를 따라 접수실로 돌아왔다. 내 모습을 본 김동수 지도원은 말도 못하고 그저 서성거리며 내 얼굴만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감방으로 가자고 하며 소좌가 나를 끌고 일어서니 김동수가 따라나오며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감방으로 데리고 간 소좌는 빈방에 나를 넣고 담요 두 장을 갖다 주었다. 담요는 닳을 대로 닳아 두 장이라고는 하지만 합쳐도 반장밖에 되지 않았다. 그마저도 얼마나 오랫동안 창고에 쳐박아두었던 것인지 썩은 곰팡이 냄새에다 땀과 때에 절은 고린내가 너무 심해 만지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그날 나는 쪼그리고 앉아 밤을 새우고 아침을 맞이했다. 아침식사라고 들어온 것은 노란 강냉이밥과 멀건 소금국물 한 공기가 전부였다. 나는 그때까지도 강냉이밥을 먹어보지 않은데다 밥이고 뭐고 다 귀찮아서 눈만 딱 감고 앉아있었다. 그렇게 날이 밝고 밤이 오고 하기를 사흘이 지났는데도 누구 하나 나를 찾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초조와 불안 분노가 교차하는 마음을 안고 거의 뜬눈으로 그 시간을 보냈다. <땀과 때에 절은 고린내 나는 담요 두 장, 노란 강냉이밥에 멀건 소금국> 1986년 11월 3일, 농포집결소에 온 지 7일째 되는 날 아침에야 바로소 이름이 불려지고 2층의 어느 방으로 끌려갔다. 방에 들어서니 같이 왔던 안전국 감찰과장과 지도원이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있었다. 구석 쪽으로 앉으라는 명령에 따라 벽에 붙여 놓은 의자에 앉았다. 먼저 입을 연 감찰과장은 오늘부터 내가 담당하고 있는 65호 공급소에 대한 전반적인 검열을 시작한다고 말했다. 검열 담당자는 안전국 감찰과 지도원 김학남과 자신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었다. 저는 검열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미 3월 29일 감찰과 검열을 받았고 검열총화까지 받았습니다. 그때 검열에 대한 안전부장의 판결이 부당하다고 판명되었고 또 중앙당 행정부 검열 그루빠(그룹)까지 내려와서 재조사까지 벌였는데 검열을 2중, 3중으로 하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만일 조선 법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규정을 보여주면 응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검열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일단 내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그때까지도 북한 사법기관의 일꾼들이 법규정대로 범죄자를 취급하는 것으로 믿고 있었던 것이다. 안전부나 보위부 일꾼들이 법규정을 제쳐놓은 채,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직권을 남용하거나 여러 가지 몹쓸 일들을 서슴지 않고 해내는 무서운 폭력기관의 하수인들이라는 사실은 상상도 하지 않았다. <일주일동안 건드리지 않고 가만 두었는데 여기 왜 왔는지 몰라? 살아나갈 생각 하지도 마!> 내가 그렇게 도전적인 자세로 나오자 감찰과장은 잘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거야.라고 내뱉고는 김학남에게 나를 맡기고 나가버렸다. 김학남은 그 당시 나이가 스물 여덟살이라고 했다. 그는 한 주일 동안 건드리지 않고 가만 두었는데 여기에 왜 끌려왔는지 그렇게도 짐작을 못하겠어? 네 입으로 다 토해놓지 않고서는 살아나갈 생각은 하지도 말라. 내가 청년장교로서 한 번 본때를 보여주겠어. 이 동무, 여기 식으로 인사를 시켜봐야 정신을 차리겠구만.하고 차갑게 이죽거리며 나를 아래층으로 데리고 갔다. 그가 떠미는 대로 접수실과 직선으로 연결된 복도 창살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 쪽 방에는 남자들만 20~30명이 있는 것 같았다. 그 방에 들어서는 순간, 갑자기 왁자지껄하며 여러명의 사람들이 나에게 달려들어 담요를 뒤집어 씌웠다. 곧 이어 무자비한 발길질이 시작됐다. 너무나 갑자기 벌어진 일이라 소리 한 번 제대로 지르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숨이 막힐 듯한 담요 속에 갇혀 여기저기서 마구 몰아치는 몰매를 맞으니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고 그저 눈에서 시퍼런 불꽃이 튀는것만 같았다. 곧바로 나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얼마나 차이고 밟히고 했는지, 또 몇 시간이나 흘렀는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몸은 손가락하나 까딱할 수 없을 만큼 전신이 부서진 것 같이 쑤시는데, 그 아픔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또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다시 문이 열리며 김학남이 모습을 나타냈다. 첫 인사맛이 어때? 이제 좀 감이 오는가? 너무나도 고통이 심해 그가 빨리 나오라고 하는데도 일어설 수가 없었다. 내가 움직이지 않자 이 년이 아직도 인사맛을 덜 봤나!라고 하며 바깥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곧 남자 두 명이 들어왔다. 그들은 사정없이 달려들어 반죽이 된 나를 짐승 끌듯이 질질 끌고 2층 계단을 지나 아침에 들어갔던 방에 쳐박듯이 넣고 가벼렸다. 그 날 저녁부터 사흘 동안 나는 단 한 시간도 눈을 붙이지 못하고 예심(죄인이 형을 받기 전에 심문받는 기간)을 받아야 했다. 안전국 감찰과장과 김학남은 교대로 잠을 자면서 24시간 예심을 했다. <남자들이 담요 뒤집어씌우더니 마구 발길질, 몰매 맞고 실신> 예심이라고는 하지만 65호 공급소 문건은 이미 안전부 경제감찰과에서 다 검열해서 통과되었기 때문에 공급소에 대한 심문을 한다는 것은 억지였다. 그들이 나에게 따진 것은 고작 보위부 일꾼들에게 어떤 상품을 얼마만큼 공급했는가, 또 당 일꾼들에게 어떤 뇌물을 주었는가, 중국에 다녀온 후 어떤 물건을 어느 당 일꾼과 보위부 일꾼에게 주었는가 하는 따위의 시시콜콜한 것이었다. 나는 북한 땅에서 출생하고 성장하고 교육을 받으면서 인권유린 행위가 무엇인지, 또 형사소송법이란 무엇인지를 제대로 모르고 살아왔다. 사람을 잡아다 가두어 놓고 잠도 재우지 않고 매질을 하면서 간부들에게 팔아 준 상품들에 대한 출처를 다 밝히라는 어이없는 예심을 받고 있으니 나는 너무나도 한심했다. 나는 도대체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 양심은 결백하여 조금도 꺼릴것이 없으니 너희들이 실컷 들볶아댄들 결국엔 별 수 없이 내놓아 주려니 하는 어리석은 생각을 했다. 안전부장 김병준, 안전부부장 김하정, 감찰과장 최주긴 등이 안전국 감찰과장 등과 서로 결탁하여 나를 희생양으로 삼은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에게 국가재산 대량탐오죄를 시인케 하여 교화소에 보냄으로써 안전부장 등에 대한 중앙당 검열 그루빠의 인사조치 문제를 부결되게 하려는 것이 그들의 의도였다. 나는 교화소에 간다는 사실은 단 한 번도 생각지 않았다. <이년이 아직도 인사 맛을 덜 봤나? `남자들이 달려들어 반죽이 된 날 짐승 끌듯> 그렇게 처음부터 나에 대한 음모로 시작된 사건이니만큼 예심은 악착같이 진행되었다. <고문연구소> 농포집결소에서 150m 정도 거리를 두고 벽돌을 굽는 爐(로)가 있었다. 나는 매일 한 번씩 그 로 안에 들어가는 고문을 당하곤 했다. 벽돌 로는 진흙으로 찍은 벽돌을 로 안에 쌓아놓고 로 입구를 밀폐시킨 후 불을 지펴 벽돌을 굽는 곳이다. 벽돌이 다 구워지면 밀폐된 로 입구를 해체하는데 그때 시뻘겋게 달아오른 불꽃이 튀고 흙먼지가 자욱한 로 안으로 집어넣어지면 너무나 뜨거워 갑자기 숨이 콱 막히면서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만다. 쓰러지면 다시 끌어내다가 찬물을 끼얹은 후 정신을 차리면 예심실로 끌고 들어와 반복해서 심문을 시작하곤 했다. 이 년아, 손도장을 찍어! 찍으면 살려준다! 이렇게 시작된 고문과 예심은 하루 이틀이 지나면서 그 도수가 차츰 높아졌다. 김학남과 감찰과장의 눈은 흡사 굶주린 맹수처럼 시퍼런 불꽃이 튀는 것 같아 마주 쳐다보기에도 끔찍하였다. 하루는 예심실이 아닌 다른 방으로 끌려갔다. <쇠창살에 손과 발을 수갑으로 달아매어 몸무게로 손목 발목살이 패어, 살갗은 터지고 갈라지고 피멍이 들어 감각도 없어 진다> 그 방에는 무릎을 꺽어 앉힌 다음 꼼짝 못하게 가죽허리띠로 묶는 형틀의자가 있고 그 옆 상위에는 세모난 가죽채찍이 놓여 있었다. 김학남은 나에게 달려들어 웃옷을 완전히 벗기고 형틀의자에 꽁꽁 묶은 후 가죽채찍을 사정없이 휘둘러 때리기 시작했다. 나는 이리저리 목을 돌리면서 조금이라도 채찍질을 피하고자 했다. 네 년이 내 손에서 며칠이나 견디나 보자! 진술서에 손도장을 찍기 전에는 살아서 나갈 생각을 절대 하지 말라! 김학남은 악에 받쳐 소리치며 사정없이 매질을 해댔다. 몇 차례의 끔찍한 고문을 당한 후, 그들이 나를 쉽게 내보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어떻게 해서든 고문을 이겨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고 고통스런 순간을 견뎌나갔다. 농포집결소에는 고문실이 세 군데 있었고, 여러 가지 고문방법이 있었다. 몽둥이 찜질고문은 10cm정도의 간격으로 만든 쇠창살에 두 손과 두 발을 수갑으로 달아매 놓는다. 허공 중에서 수갑에 매달리면 몸의 무게 때문에 두 손목과 발목의 살은 패이는 것처럼 쓰라리고 아프다. 거기에 고무 몽등이로 전신을 사정없이 내리치면 살갗은 터지고 갈라지고 피멍이 들어 나중에는 내 몸이 사람의 살이라는 감각마저 없어진다. 온 몸이 큰 통나무처럼 퉁퉁 부어오르고 용변을 보려 해도 두 무릎이 굽혀지지 않아 서서 봐야했다. 내가 농포집결소에서 고문을 받을 때가 서른 아홉살이었다. 김학남은 내가 하지도 않은 일을 적어 놓은 진술서에 절대로 도장을 찍을 수 없다고 계속 버텨나가자 약이 오를 대로 올랐다. 그는 무조건 자신들의 말에 시인하지 않고서는 배겨낼 수 없을 것이라고 하면서 이곳 저곳의 고문실로 끌고 가는 일을 반복했다. <옷 벗기려는걸 결사적으로 대항하다 뺨을 후려쳐 실신했다 깨니 입안에서 와지끈, 이빨 부러지고...피바다> 어느 날 옷을 벗길 때 결사적으로 대항하다가 뺨을 후려치는 바람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얼마 후 눈을 떠보니 입안에서 무엇인가 와지끈 씹히는 느낌이 있었다. 부러진 이빨이었다. 입과 코로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는지 바닥은 온통 시뻘겋게 피바다가 되었으며 얼굴이 퉁퉁 부어올라 눈도 잘 보이지 않았고 입도 열 수가 없었다. 나는 간신히 입술을 올려 밀고 부러진 이빨을 뱉아냈다. 윗니 4개가 한꺼번에 부러져 나가고 이빨 전체가 다 들떠서 덜거덩거렸다. 잇몸이 통째로 빠져버릴 듯한 심한 통증이 몰려왔다. 새벽 5시에 예심에 끌려나가면 밤 12시가 넘어야 감방에 돌아온다. 있지도 않은 일을 날조해 놓고 그를 인정하라고 매일 같은 질문을 반복하고 매질하는데 어느 정도 저항력이 생겼는지 처음보다는 참고 견디기가 좀 나았다. 그동안 계절이 바뀌어 어느덧 겨울 추위가 닥쳐왔다. 예심을 맡고 있는 김학남은 두 눈에 핏발을 세우고 야수처럼 날뛰었다. 이 년이 뜨뜻한 방에 앉혀놓으니 내장이 편안해서 더 뻗대는데 정신을 차리게 해 줘야겠구만. 그는 나를 끌고 청사 마당으로 나갔다. 방안에서 나올 때 겉에 입은 옷을 벗기고는 내의 바람으로 앉혀 놓는다. 이 년을 냉동시켜! 겨울 밤 바깥 날씨는 당장에 살점을 저미는 것 같이 맵짜다. 처음 20~30분까지는 손, 발, 귀가 너무나 시리고 추워서 미칠 것만 같이 고통스럽지만 그 고비를 넘기면 온 몸의 감각이 사라져 시린지 쓰린지 통 분간을 못할 정도이다. 농포집결소에 수감된 후 다른 수감자들과는 별도로 혼자 갇혀 있었기때문에 집결소 안에 어떤 사람들이 몇 명이나 있는지 짐작도 못한 채 몇 달을 지내왔다. 1986년 1월부터 그렇게 밤마다 한 시간씩 추운 마당에서 동태고문을 당할 때 그 곳에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남자)들도 여러 명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동태고문은 집결소 계호원(간수)들이 바깥에서 사람을 꽁꽁 얼린다고 하여 자기들끼리 지어낸 말이었다. <86년 1월부터 밤마다 한 시간씩 추운마당에서 동태고문> 1월 말경 또 다시 동태고문을 받으려고 마당에 나왔다. 그때 마당에는 10명정도 되는 남자 죄수들이 일렬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나를 보고 맨 끝에 앉으라고 하기에 끝자리를 향해 앉아 있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갔다. 그 때 갑자기 낮은 목소리로 순옥동무!하고 나를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주춤거리며 목소리의 임자를 내려다보니 뜻밖에도 회령군 물자공급소장 최영환이었다. 때마침 동태고문을 감시하느라 나온 계호원 박 특사가 추위를 녹인다고 접수실로 들어간 짬이었다. 그를 거기서 만난것은 너무 뜻밖의 일이었지만 반가움이 앞섰다. 최영환뿐 아니라 거기에 앉은 사람들 중에는 지난날 업무상 알고 지내던 구면들이 있었다. 물자관리상사 사장 이윤철과 안전국 외화벌이 사업소 지배인 김웅길, 청진 선원구락부 부기장 김씨, 중앙은행 외화과장 장씨, 회령군 중앙은행 금은수매원 김순녀, 청진시 수북 식료상점 책임자 조순복 등이 나처럼 수감되어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최영환 소장은 원래 온성군 물자공급소 부소장을 지내다가 1982년에 회령군 물자공급소장으로 승진되어 갔기 때문에 나와는 매우 가깝게 지내던 사이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는 자기 자신보다도 나를 더 염려해주었다. <시멘트 바닥에 낡은 담요 한 장 깔고 누우면 밤새 떠느라 잠자는 것도 고문이었다> 순옥이, 몸이 견딜 것 같소? 죽지 말고 살아서 꼭 진실을 해명해야지, 이대로 죽으면 동철이나 교장선생은 어떻게 되겠소? 그리고 사람들은 우리를 오해해서 두고두고 욕할 거요. 이때 개털로 만든 안전원 외투를 걸친 박 특사가 마당으로 나왔기 때문에 우리는 말을 끊고 침묵을 지키며 앉아 있었다. 사람들의 발길에 밟혀 다져진 흰 눈 위에 희미한 달빛이 반사되었다. 그 위에 줄지어 꿇어 앉은 사람들의 모습은 꼭 무슨 돌덩이들이 웅크리고 엎디어 있는 것 같은 괴이한 인상을 주었다. 회령 중앙은행의 김순녀는 원래 몸집이 큰 아줌마인데 고통스럽고 억울해서인지 한 시간 내내 흐느껴 울고 있었다. 계호원은 한 바퀴 둘러보고는 발이 시린지 구둣발을 동동거리며 어 추워! 죽을 놈 나 오라는군 하며 접수실로 들어가 버렸다. 그렇게 한 시간 가까이 꿇어앉아 있노라면 그야말로 육신은 동태가 되었다. 그만 일어나라고 계호원이 고함을 쳐도 바로 몸을 움직일 수 없어 몇 번씩 언 땅바닥에 뒹굴고서야 겨우 중심을 잡으며 감방 복도에 들어서게 된다. 예심을 하는 방은 그런대로 훈훈하여 언 몸이 녹겠지만, 동태고문 후엔 꽁꽁 언 몸 그대로 곧바로 감방에 넣었다. 감방이라는 곳은 바깥보다는 좀 낫지만 역시 냉방이다. 시멘트 바닥에 다 낡아빠진 담요 한 장을 깔고 한 장을 덮고 누우면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 때문에 밤새 떠느라 잠자는 것조차 고문이었다. 또 며칠씩 물 한 모금 주지 않고 급식중지를 시켰다. 3~4일 동안 물도 먹이지 않으니 갈증과 현기증으로 몸을 가누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가장 고통스러워할 시간이면 으레 끌어다 자기들 먹는 식당 한 편에 세워 놓고 저희들이 먹는 구경을 시킨다. 그럴때면 며칠 비어 있던 위와 온 내장이 다 일어나는 듯 구역질이 나고 현기증으로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다. 그런 때에 또 끌어내다 손도장을 누르라고 강요했다. <안전원들에게 뇌물을 잘 주지 않다 죄인으로 몰려> 2월에 들어서면서 죄수가 늘어났는지 나 혼자 있던 감방으로 회령에서 온 김순녀와 청진 수북식료상점 책임자 조수복이 옮겨왔다. 나는 농포집결소에 수감된 후 내내 혼자 있었기 때문에 안에 몇 명이나 수감되어 있는지, 또 어떤 범죄자를 이곳에 수감시키는지 통 모르고 지냈었다. 낮에는 서로 다른 시간대에 예심을 받기 때문에 말을 나눌 겨를이 거의 없지만 예심이 없는 밤 시간에는 계호원의 눈을 피해가며 소곤소곤 말을 나눌 수 있었다. 잠을 잘 때도 담요 3장을 깔고 나머지 3장을 겹쳐서 덮고 서로 꼭 껴안고 잘 수 있어서 체온으로 추위도 녹이고 또 서로 마음의 의지도 되었다. 자연히 우리는 그 경황 속에서도 서로 기대는 친구가 되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그날 밤 마당에서 동태고문을 받던 12명이 지금 농포집결소에서 예심을 받는 죄수라고 하였다. 그들은 한결같이 안전원들에게 뇌물을 잘 주지 않았다가 안전원과의 갈등이 커져 죄인으로 몰린 사람들이라고 했다. 안전원과의 갈등으로 죄인 취급을 받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안전국이나 농포집결소에서는 더 가혹한 고문을 가했다. 다시 말해서 감히 안전원한테... 맛 좀 봐라는 식으로 우리를 다루는 것이다. <칼라TV 부당공급 안했다고 끌려가 죄인 취급받고 엄청난 대가 치뤄> 이 고문에서 견디지 못하면 진실을 해명하지 못할뿐더러 억울하게 개죽음을 당한다는 사실을 잘 아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상상을 초월하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오직 살아서 나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고통스런 시간을 이겨 나가고 있었다. <숙청의 피해자들> 1986년 10월은 함경북도내 사법, 검찰, 안전 일꾼들이 사건처리를 잘못하여 인권유린 행위를 한 데 대해 당중앙위원회 행정부에서 검열을 가졌던 시기였다. 그 결과 안전부, 검찰소 일꾼들이 물자를 취급하는 사람들에게 물품 상납을 요구했고, 그 중에서 거절한 사람들은 부당하게 구금하여 사회여론을 조성시킨 사람들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비리를 감추기 위해 거꾸로 나와 같은 물자공급 책임자 수십명을 법적인 혐의사실이 없음에도 마구 잡아다 구금하였다. 소위 세력 있는 자는 자기 위치를 내세워 욕심을 챙기려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런 일들로 당보위부와 안전부 일꾼들 사이의 알력관계는 나날이 심해졌고 나와 같이 생필품을 공급하는 상업부문 일꾼들이나 이와 유사한 부문에서 일하는 일꾼들은 중간에서 억울한 희생물이 되는 것이다. 고래싸움에 새우등이 터진다는 격이었다. 3처 물자관리상사 사장 이윤철(42세)도 안전부 담당주재원이 부당하게 요구하던 TV를 주지 않았다가 이런저런 생트집을 잡혀 집결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군대 제대 후 인민경제대학을 졸업하고 3처 물자관리상사 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일본과의 무역을 성공적으로 이루었기 때문에 당의 신임이 컸던 사람이었다. 도에서 채취한 송이버섯, 미나리, 고사리, 명란젓 등으로 일본과 교역하여 냉장고, 칼라TV, 녹음기, 양복천을 비롯한 여러 가지 물자들과, 도내에 있는 김일성의 특각(별장)이나 외국인 전용호텔에서 소비하는 식료품, 일용품들을 수입했다. 또한 김정일 생모 쪽의 친척인 청진 7세대의 물자공급도 담당했다. <오른쪽 다리마저 제대로 쓰지 못해 끌고 다니는 반신불수> 자연히 그에게 달라붙는 간부들이 대단히 많았다. 당간부들은 물론이고 보위부, 안전부 간부들이 암암리에 그에게서 양복천이나 TV, 냉장고, 녹음기, 식료품을 요구해 가져갔다. 3처 물자관리상사는 도급 안전부에서 담당하게 되어있다. 담당주재원은 자기의 명목을 내세워 여러 차례 적지 않은 물품들을 빼내갔다. 이윤철은 그의 부탁을 대부분 들어주었지만 그가 너무나 무리하게 칼라TV를 요구했을 때는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칼라TV 한대 때문에 그는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된 셈이었다. 그는 내가 수감되기 7일전인 10월 19일에 농포집결소에 수감되었다고 한다. 역시 아침에 출근했다가 사무실에서 잡혀왔다. 양복차림에 구두를 신고 왔는데 옷이 얇아서 몹시 춥다고 했다. 내가 그를 만난것은 1987년 4월이었다. 그때부터는 도 안전국 기본 예심대상자인 12명에 대한 예심방향이 좀 달라졌다. 매일 마당에서 한 시간 정도 운동도 시키고 입었던 옷도 세탁하게 하였다. 김일성의 생일을 맞아 다른 잡범들은 이미 다 석방시키고 집결소 안에는 북한식으로 말하면 12명의 악질들만 남았던 것이다. <고름딱지 밑으로 싯누런 고름이 목덜미까지 흘러내려> 그 때는 예심원들도 모두 도 안전국에 들어가고 집결소 계호원들이 경비근무를 서고 있었다. 계호원들은 우리에게 그다지 심하게 굴지 않았다. 그래서 마당에서 서로 만나면 말을 나눌 기회가 많았다. 이윤철은 원래 성품이 매우 단정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너무도 억울했던지 나를 만난 첫날에 그답지 않게 눈물을 쏟았다. 나는 내 몰골이 얼마나 처참한지는 가늠하지 못하고 그의 몸이 엉망으로 상해있는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얼굴에 온통 피멍이 든 것은 물론이고 오른쪽 다리마저 제대로 쓰지 못해 걸을 때 끌고 다녔으며 오른손도 바로 쓰지 못하는 반신불수의 상태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1월의 날씨에 바깥에서 동태고문을 당할 때 얼었던 귀가 그때까지 낫지 않고 어린아이 손바닥만큼이나 커졌으며 시커먼 고름딱지가 앉은 밑으로는 싯누런 고름이 목덜미에까지 흘러내려 보기에도 끔찍할 정도였다. 그 역시 악착스러운 여러가지 고문을 받은 끝에 반신불수가 된 것이다. 아마도 남자들이 그런 고통에는 저항력이 더 약한것 같다. 무엇보다도 갑자기 적은 양을 먹게 되니 배고픔을 참는 것이 힘든 모양이었다. 불과 몇 달 사이에, 그렇게도 사업열에 넘치고 생기에 찼던 사람이 과연 그 사람이었는가 싶게 아주 못쓰게 된 것 같았다. 맨땅바닥에 앉혀놓으면 제대로 몸의 균형도 잡지 못할정도로 그의 옛 모습은 사라져 버렸다. 회령군 물자공급소장 최영환은 더 심하게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그도 회령군 안전부 감찰과 지도원과 검찰소 검사와의 알력 관계 사이에서 희생물이 된 경우이다. 최영환은 물자공급소장을 지내면서 감찰과 지도원과 매우 가깝게 지냈다. 그가 요구하는 물건은 최대한 다 해결해 주었다고 한다. 그러자 검찰소 검사는 최영환이 자기보다 안전부 지도원에게 더 잘한다고 오해를 했다고 한다. 물자공급소에 들어온 TV는 소장의 권한으로도 마음대로 판매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아는 검사는 TV를 요구했다. 그 요구를 들어주느라 최영환은 군 당 몰래 검사에게 1대를 팔아주었는데 그 후 그 문제가 군 당에 반영되어 최영환과 검사가 당적으로 추궁을 받고 TV는 다시 회수하여 군당에게 배정했다. 그 일을 두고 검사는 최영환이 자기 이름을 댔다고 앙심을 품고 있다 그를 잡아넣었던 것이다. <심한 고문으로 하체가 마비되어 대 소변도 못 가리다> 그때 그의 나이가 쉰 넷이었다. 그는 6?5전쟁때 낙동강 전투에 참가했으며 영예군인(전쟁부상자)으로 북한 노동당을 위해 자기의 목숨을 걸고 싸운 사람이었다. 그런 그도 결국은 TV 한대 때문에 검사의 희생물이 되었다. 그는 농포집결소에 갇혀 물자공급소 소장을 지내면서 당 일꾼들에게 어떤 물건들을 팔아주었는가, 어떤 뇌물을 바쳤는가 하고 매일 고문을 당했다. 벽돌 굽는 로 안에 밀어넣는 고문을 당할 때 시뻘겋게 달아있는 로 벽을 짚어 두 손바닥이 화상을 입었으나 치료를 받지 못해 3개월이 지난 후에도 상처가 아물지 않고 있었다. 그는 하루 3번 주는 소금국물로 화상부위를 씻어냈지만 요즘에는 배가 너무 고파 소금국물을 다 마셔버리다 보니 상처가 화농하여 피고름이 흘러내린다고 했다. 그는 하체가 완전히 마비상태였기 때문에 대소변이 나가는 것을 전혀 감각하지 못하여 자주 바지에 오줌과 똥을 싸 옆 사람과 계호원들의 천대가 극심했다. 그가 바지에 똥을 쌌을 때에는 옆 사람들이 질질 끌고 마당으로 나가 찬물을 끼얹어 씻어준다. 그래도 그는 차거나 시린것을 몰랐다. 나이도 있는데다 너무나 모진 고문으로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그는 몸의 모든 감각을 다 잃어버렸다. 4월말경 더 이상 고문을 이겨낼 수 없는 그는 원한을 품은채 이 세상을 떠났다. 집결소로 잡혀 들어올 때에는 건강한 체구로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들어왔는데 결국은 그렇게 생을 마감한 것이다. 그에게는 3남 2녀가 있었는데 위로 아들 둘은 인민군대에 복무중이었다. 그후 나는 개천교회에서 회령군병원 소아과 의사 조금희를 만나 최영환의 가족 소식을 전해들었다. 아버지가 잡혀 들어가 미결수로 죽은 후 두 아들은 군대에서 생활제대되었고 김책공대를 다니던 셋째도 퇴학당했으며 전 가족이 회령읍에서 추방되어 시골농장으로 쫓겨가 고생한다고 했다. 최영환의 체포 후 몰수했던 재산은 하나도 돌려주지 않았다고 한다. <너를 내놓으면 내가 죽는다는 올가미에서 벗어나지 못해> 나를 처음 만났을 때 최영환은 이 안(집결소)에서 죽으면 억울한 누명을 벗지 못해, 꼭 살아나가야 당에서 해명해 줄 것이야라고 하면서 힘을 돋워주었는데 눈도 감지 못하고 먼저 떠나간 것이다. 안전국 외화벌이사업소 지배인 김웅길(48세)은 계급이 상좌였다. 그는 사업소 사람들과 함께 함경남도 경포에 나가 살다시피 하면서 명태, 명란젓을 비롯한 여러 가지 외화벌이를 하여 1984~1985년 두 차례에 걸쳐 안전국 안전원들에게 가구당 1대씩 TV와 냉장고를 공급해 주었다. 겨울 명태따기철이면 술이 많이 소비되었다. 겨울 추위 속에서 명태알 따기나 기차 수송을 하자면 술을 가지고 서로 사업교제를 하는 곳이라고 하여 북한에서는 경포, 신포지구를 일명 홍콩시장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김웅길이 외화벌이를 하여 안전국 안전원들의 첫 번째 희망사항인 TV, 냉장고를 구입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물물교환이 많이 이루어졌다고 하여 잡혀와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안전국 소속의 외화벌이사업소 지배인이며 또 군사직급도 상좌였기 때문에 예심하는 사람이 자기한테 너무 심하게 대하는 데 분개해 항의를 함으로써 더 많은 매를 맞는 것 같았다. 그는 온 집결소 청사가 떠나갈 듯한 고함을 지르며 반항하였다. 자기는 비록 규정을 위반했지만 국가재산에 손해를 끼친 일은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그도 너를 내놓으면 내가 죽는다는 올가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심한 고문으로 한쪽 귀가 떨어져 나갔으며 하반신 마비가 되어 안전국 구류장에 이감된 후 죽었다고 한다. <모진 고문에 못이긴 노인이 청진 역에서 기관차 훔쳐 팔았다고 자백> 청진시 선원구락부 부기장(경리책임자 60세)은 하지도 있지도 않은 사실을 인정하라고 매일같이 고문을 받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그는 무엇이든 큰 것을 도둑질했다고 하면 매질이 덜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청진역에 있는 기관차를 훔쳐 팔아먹었다고 했다. 정말 세상이 다 웃을 진술이다. 노인이 그 큰 기관차를 어떻게 훔칠수 있겠으며 또 누가 그것을 산단 말인가. 얼마나 고문을 모질게 했으면 그런 엉뚱한 자백까지 나왔으랴 싶고, 또 한편으로는 그것이 국가 일만 정직하게 하며 평생을 살아온 노인의 억울한 하소연임을 알 수 있다. 그 후 집결소 예심원들과 계호원들은 그 부기장의 별명을 기관차 대가리라고 불렀다. 그 노인은 귀를 심하게 비틀려서 한쪽 귀가 뭉텅 떨어져 나갔다. 청진시 수북여자고등중학교 교장은 살인혐의를 쓰고 수감되었다. 학교 숙직실(경비실)에서 여교원 둘이 맞아죽었는데 누군가가 강간하려고 한 것 같다고 했다. 아침에 맨 먼저 출근해서 학교를 돌아보던 교장선생이 발견해 안전부에 신고를 했다. 수사중 아무런 진전이 없자 맨 처음 신고한 사람이 살인자라고 판명하여 그를 수감시킨 것이다. 그 후 그는 2년 동안 자기는 절대로 살인을 하지 않았다고 부인함으로써 갖은 고문을 당하였다. 각종 전기고문으로 두귀는 완전히 녹아내려 귓구멍만 남아 있고 손가락 열 개가 녹아 붙어 몽당손이 되었다. 그리고 한쪽 다리가 짧아져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했다. 입도 삐뚤어져 그가 무슨 말을 해도 분간해 듣기가 매우 힘들었다. 아랫입술을 심하게 실룩거리기 때문에 말이 새어나가 발음이 정확치 못했다. 원래 그는 키가 훤칠하게 크고 몸체도 튼튼했는데 2년간의 구류장 생활로 몸 전체가 쪼그라들어 열 살 남짓한 소년의 몸집만큼 되었다. <살해된 여교원 신고했다 범인으로 몰린 교장 진범 나타나자 불구된 몸으로 석방돼 곧 죽다> 2년 후 여교원을 살해한 진범인 살인강도 두 명이 붙잡혔다. 그들은 학교 음악실의 손풍금을 훔치러 들어갔다가 여선생 두 명이 숙직실에 있는 것을 보고 강간하려다 죽였다고 한다. 그들은 다른 곳에서 도둑질을 하다가 잡혀 조사받던 중 여선생 살인도 자신들이 한 짓이라고 털어놓아 그 사건이 해명된 것이다. 교장은 여선생을 죽이지 않았으면서도 날조된 예심문서에 도장을 찍으라고 온갖 고문을 당한 끝이라 완전히 폐인이 되고 말았다. 북한 사법기관의 일꾼들은 사건을 다룰때 아무런 근거와 혐의사실이 없어도 무조건 사람을 잡아다가 거짓 실토라도 하지 않고는 배겨낼 수 없는 여러 가지 고문을 일삼고 있다. 평생을 교육사업에 바쳐온 교장은 2년간의 수감생활로 정신이 피폐해짐은 물론 육체가 완전히 불구가 되었다. 안전국은 그를 석방시키면서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책임을 철저히 회피했다. 오히려 교장은 집결소와 구류장에 수감되었을 때 고문받은 사실을 세상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비밀을 고수하겠다는 서약서에 도장을 찍은 후에야 석방되었다. 석방 후 그는 노동능력 상실자로서 일도 못했지만 아무런 치료대책이나 보상도 없이 지내다가 병이 악화되어 사망했다고 한다. <죽기 전엔 나갈 수 없다는 것 안 그는 고체 양잿물을 배추 잎에 싸서 먹고> 김광석(27세)은 나진시에서 잡혀왔다. 그는 세 살 때 어머니의 등에 업혀 일본에서 귀국한 북송동포 청년이었다. 원래 그는 키가 컸으며 힘도 장사였다. 나진시에서 쌍둥이형제라고 부르면 누구든지 다 알아보는 힘장사라고 했다. 그들 형제는 겨울에 두만강에 나가 스케이트를 타면서 중국사람들과 어울렸던 것이 화근이 되어 잡혀왔다. 사상이 확고하지 못하다는 것이 그들의 죄목이었다. 혁명화 관리소(정치범수용소)에 보내기 위한 비준기간 중 집결소에 수감시켰다. 일단 관리소에 들어가면 죽을 때까지 바깥 세상에 다시 나올 순 없다는 것을 안 그는 죽으려고 고체 양잿물을 배추잎에 싸서 먹었다. 위 수술을 받은 후 며칠 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도망칠 기회를 노리다가 수술자리가 채 완쾌되기도 전에 중국으로 탈출했다. 함께 탈출하지 못한 그의 형은 혁명화 관리소에 끌려가고 말았다. 출처 : 한국논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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