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칼럼
2017년 2월 21일   18:49
로그인 회원가입 기사제보
필자의 다른글   기사 확대기사 축소리스트프린트
"冷戰에서 승리를 얻어낸 것은 우리 '反共主義者'들이었다"
'마거릿 대처'를 歡呼하며
법적 준비를 마친 대처는 영국 최대의 노동조합인 탄광노조와 決戰을 준비했다. 대처는 우선 연간 석탄 생산량의 절반에 해당하는 5,700만 톤의 석탄을 비축하고 여기에 더해 폴란드, 호주, 프랑스 등으로부터 석탄을 긴급 수입하는 계획을 수립했다. 그리고 비축된 석탄이 원활하게 운송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석탄과 석유를 倂用할 수 있게 시설을 개선했다. 마지막으로 지방단위로 분산돼 있는 경찰력을 유기적으로 조사해서 언제라도 파업현장에 투입될 수 있도록 했다.
출처 : 자유주의 사상가12인의 위대한 생각 林素影 

마거릿 대처

영국 최초의 여성총리인 마거릿 대처는 취임하자마자 개혁에 착수했다. 야당당수시절 대처는 저명한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와 밀턴 프리드먼을 만나서 깊은 인상을 받은 적이 있다. 하이에크는 제1차 세계대전 후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발생했던 超인플레이션을 경험한바 있었고, 프리드리먼은 통화주의자로서 인플레이션을 해소하는 통화정책을 주창한 사람이었다. 이들의 영향과 영국의 긴박한 상황으로부터 대처는 인플레이션 잡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설정했다.

 

그녀가 설정한 목표애 대해 야당은 물론 보수당 의원들조차 반대했다. 인플레를 잡기위해서는 긴축정책을 실시해야하는데, 긴축재정을 하면 가뜩이나 좋지 않은 경기가 더 나빠질 것이고 기업의 파산과 실업자 수가 더욱 늘어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정치적 인기가 하락하는 것은 불 보듯 뻔한 것이다. 하지만 대처는 자신의 의지를 밀어붙여 적극적인 통화억제와 긴축정책을 실시했다.

 

긴축정책의 결과 대처정부가 들어선 이후 3년간 영국경제는 이전보다 더 심각한 침체를 경험하게 된다. 경쟁력 없는 기업들이 파산하고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하면서 실업자수가 300만 명을 넘어섰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대처가 목표했던 대로 인플레이션이 1980년 8.6%로 감소했다는 점이었다. 대처는 국민들에게 "인플레이션 문제가 해결되고 있으므로 경제가 조만간 좋아질 것"이라고 하면서 "개혁에는 시간과 고통이 따르게 마련"이라고 설득했지만 그녀에 대한 지지도는 떨어지기 시작했다.

 

개혁의 고통을 견디고 있던 1982년 3월, 아르헨티나軍이 영국에서 1만 3000Km 떨어진 남대서양에 위치한 영국령 포클랜드 섬을 점령했다. 대처는 전쟁을 결심했지만 懷疑論이 만만치 않았다. 국방부에서는 엄청나게 먼 거리와 남대서양의 겨울날씨를 감안할 때 포클랜드를 탈환하는 것이 불가능 하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외무부에서는 아르헨티나에 명목상의 통치권을 인정해 주고 대신 행정권을 임치하자는 협상안을 건의했다. 행정부의 관료들은 26년 전 수에즈운하 사태 당시 이든 총리가 이집트를 침공했다가 실패, 사임했던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대처는 1982년 4월 1일 비상 내각회의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국민들에게도 "실패?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안심시켰다. 이렇게 해서 항공모함 두 척을 포함해 핵잠수함, 구축함, 보조순양함 등으로 구성된 戰鬪船團이 출정했다. 영국군은 폭풍과 빙하를 헤치면서 전투를 벌였고 75일간의 격전 끝에 아르헨티나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 전쟁에서 영국은 사상자 452명과 항공기 25대, 함정 13척을 잃었으며 15억 달러의 戰費를 소비했지만 패배주의로 가득 차있던 영국의 분위기를 극적으로 반전시키는 효과를 얻었다. 전쟁 후 대처의 인기는 급상승하여 80%이상의 지지율을 기록했다. 이듬해 치른 총선에서 보수당은 여세를 몰아 397석을 획득함으로써 209석의 노동당을 압도적으로 물리치고 재집권에 성공할 수 있었다.

 

대처의 개혁이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노동조합이라는 거대한 산을 반드시 넘어야만 했다. 노조는 영국병의 주요원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정부의 개혁정책을 좌절시키는 가장 큰 장애물이었던 것이다. 대처는 우선 노조의 특권을 규정한 법률을 하나 둘 고쳐나가기 시작했다. 파업과 협약체결을 위한 조합원투표를 비밀로 하게 하였고 (우편투표제), 기업이 비조합원의 고용을 거부하는 행위를 금지했다. 그리고 파업찬반 투표에서 승인을 받은 파업에 대해서만 면책특권을 인정하고 2차 파업(동조파업, 지원파업)을 주도한 조합간부의 면책특권을 박탈했다.

 

*법적 준비를 마친 대처는 영국 최대의 노동조합인 탄광노조와 決戰을 준비했다. 대처는 우선 연간 석탄 생산량의 절반에 해당하는 5,700만 톤의 석탄을 비축하고 여기에 더해 폴란드, 호주, 프랑스등으로부터 석탄을 긴급 수입하는 계획을 수립했다. 그리고 비축된 석탄이 원활하게 운송될 수 있도록 운수노조에 가입하지 않은 비조합원 운전기사들을 대량으로 확보했다. 발전소 가동에 지장 없도록 하기 위해 석탄과 석유를 병용할 수 있게 시설을 개선했다. 마지막으로 지방단위로 분산돼 있는 경찰력을 유기적으로 조사해서 언제라도 파업현장에 투입될 수 있도록 했다.

 

*탄광노조 역시 대처와의 一戰을 준비하고 있었다. 탄광노조는 1974년 총파업을 벌여 국가비상사태를 유발하고 전력공급을 일 주당 3일로 제한하게 만들어 히스내각을 붕괴시킨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과격하기로 유명했던 노조위원장 아더스카길은 대처정부가 추진한 개혁조치에 불만을 표시하면서 기회만 오면 파업을 벌여 대처를 굴복시키려고 했다.

 

<탄광노조를 굴복시키다>

1984년 3월 대처정부는 석탄산업 합리화 계획을 발표했다. 채산성이 없는 20여개의 탄광을 폐쇄. 통합하고 직원 2만 여명을 정리해고 한다는 것이었다. 탄광노조는 기다렸다는 듯이 총파업에 돌입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파업은 363일간 계속되었다. 이 기간에 각종 폭력사건으로 체포, 기소된 건수가 1만 건을 넘었다. 그 중에는 살인이 3건 상해가 468건, 협박 290건, 방화15건, 절도 380건, 경찰관에 대한 폭력과 공무집행방해도 2,000건에 달했다. 경제적 손실 역시 막대했다. 1984년도 국내 총생산의 1%가 넘는 30억 파운드의 손해가 발생했다. 파업이 진행되는 동안 대처는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았다. 찬반투표를 거치지 않은 불법파업이라는 이유로 법원은 탄광노조의 재산을 동결했으며, 스카길 등 파업주동자 3명에 대해서는 벌금 20만 파운드를 부과했다. 파업이 진행되면서 파업지지파와 반대파간의 분열이 극심해졌다. 견디다 못한 스카길은 1985년 3월 3일 1년간의 파업 끝에 "희생이 너무커서 더 이상의 파업 속행은 불가능하다"며 손을 들고 말았다.

 

영국 최대의 노조가 패배하게 되자 다른 노조들도 기존의 강경한 태도를 바꾸기 시작했다. "탄광노조가 12개월 동안 싸워도 안 되는 것을 우리들이 파업으로 얻어낼 수 있을지 극히 의문스럽다"고 하면서 정부가 제시한 임금인상률을 순순히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대처는 1990년 까지 지속적으로 노동법을 개혁하면서 노조의 특권을 배제하고 노동개혁을 달성했다.

 

영국경제를 침체에 빠지게 한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정부가 소유하고 있는 공기업들이었다. 대처가 총리에 취임할 당시 영국의 공기업 수는 50여개였고, 여기서 일하는 근로자 수는 200만 여명이었으며, 생산량은 국내총생산(GDP)의 10%를 차지하고 있었다. 대처는 영국의 주요산업이 국유화됨으로써 공기업 경영자들이 기업가정신을 잃고 무사안일에 빠져 이윤동기를 상실하게 됐다고 판단하고 대대적으로 민영화에 착수했다.

 

1984년 영국 통신매각을 시작으로 철도, 석탄, 전기, 수도 등 다수의 공기업들이 매각됐다. 민영화 정책을 통해 스스로의 창의와 노력으로 기업이 생존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공기업의 만성적인 적자가 완화되면서 경영상태가 호전됐다. 뿐만 아니라 공기업 매각 수익금으로 재정 적자를 해소하여 1987년에는 공공부문의 재정수지가 흑자로 돌아서게 됐다.

 

<실업률 저하, 흑자재정실현>

공기업의 민영화와 같은 발상으로 공공주택의 불하정책도 실시했다. 대처정부가 집권하기 전까지 영국 정부는 수많은 공공주택을 건설하여 근로자들에게 임대하고 있었는데, 이로 인해 財政負擔이 늘어나고 주택의 질도 나빠졌다. 대처는 공공주택을 저렴한 가격으로 거주자들에게 매각함으로써 정부의 재정 부담을 줄이고 주택의 질을 높였다. 대처가 집권한 10년 동안 주택소유자 수가 100만 명 이상으로 증가함에 따라 이전에는 무산계급에게 주어지는 혜택에 안주하고 있던 근로자들에게 자신의 노력으로 자기소유의 집을 가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했다.

 

한편 대처는 국민들의 경제활동 의욕을 높이기 위해 적극적인 減稅政策을 실시했다. 1979년 소득에 대한 기본세율을 30%로 낮추었으며 근로소득과 투자소득을 구분하지 않고 최고 세율을 60%로 낮추었다. (이전에는 최고세율이 98%에 이른 적도 있었다) 1988년에는 11단계로 나뉘어 있던 누진세율 적용구간을 대폭 축소해서 25%와 40%의 두 단계로만 구분하고 법인세율도 대폭 낮추었다. 이러한 세제 개혁의 결과 노동당 시절 세금을 피해 해외로 빠져나가던 돈이 다시 영국으로 되돌아오게 됐고, 국민들의 근로의욕과 투자의욕이 크게 향상됐다.

 

대처의 경제개혁은 시간이 지나면서 가시적인 성과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1987년 영국의 인플레율은 선진국 최저수준인 3.7%로 떨어졌고, 경제성장률은 4.25%를 기록해 OECD국가 중 상위권으로 도약했다. 실업자 수는 1987년에 300만 명 이하로 떨어지기 시작해 1989년에는 200만 명 이하로 떨어졌다. 재정수지는 1987년 18년 만에 약 30억 파운드의 흑자를 기록하더니, 1988년에는 140억 파운드의 흑자를 기록했다. 강철 같은 의지로 밀어붙인 개혁이 성과를 거두면서 그녀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가 높아져 1987년 선거에서 또다시 노동당을 물리치고 세 번째의 집권에 성공하게 되었다.

 

<"냉전에서 승리를 얻어낸 것은 우리 反共主義者들이었다" 마거릿 대처>

 

대처는 야당 당수시절 미국을 방문하여 집권당인 노동당의 사회주의적 정책을 강하게 비판한 적이 있었다. 이에 대해 노동당이 반발하고 나서자 그녀는 "나는 사회주의를 선전하기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영국 노동당에 대해서 이정도일진대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에 대해서는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대처는 야당시절부터 "소련이 세계정복을 노리고 있다. 소련은 세계역사상 일찍이 보지 못했던 강대한 제국주의 국가가 될 수 있는 방법을 손아귀에 넣고 있다"면서 공격의 칼날을 세웠다. 이에 대해 소련은 그녀를 "鐵의 여인",""라고 부르며 공격했다. 1970년대 중반 대처가 야당 당수로서 소련을 공격하던 때는 국제적으로 데탕트 분위기가 우세했던 시기였다. 미국의 닉슨. 포드. 카터 대통령이 집권하는 기간에 동서냉전을 완화시키기 위한 화해정책이 추진되었던 것이다. 대처는 데탕트가 소박한 생각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데탕트의 옹호자들은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지 말아야하며, 안전을 원한다면 위협을 하지 말아야하며, 협조를 원한다면 타협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시각은 틀린 것이다. '소련과 타협에 열중한 행정부'들이 미국을 이끄는 동안 소련은 군비를 확충하고 전 세계에서 군사개입에 열을 올렸다. 그러나 군사적 우월성, 체제경쟁, 소련세력의 후퇴를 목표로 삼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천명한 미국 대통령(레이건)이 등장하자소련은 협조를 하고 무장을 해제했으며 결국은 무너졌다"

 

1984년 고르바쵸프를 런던으로 초청했는데, 당시 고르바쵸프는 격렬한 권력투쟁의 와중에 있었다. 그녀는 소련을 다루는데 있어서 고르바쵸프가 적절한 상대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고르바쵸프를 초청해 그의 위신을 높여줌으로써 고르바쵸프의 집권에 일조했다. 그 후 대처는 고르바쵸프와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면서 소련의 개혁. 개방정책을 지원했다. 그러나 후일 대처는 고르바쵸프를 '공산주의 소련을 구하겠다고 선언했으면서도,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너무나 거창한 실패를 맛본 정치인'으로 평가했다.

 

대처는 냉전을 [자유. 진실. 정의를 위한 전쟁]이라고 생각했으며, 반드시 승리하여 자유세계를 지켜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자유의 가치관에 대해 역사적으로 깊이 헌신하고 있는 미국과 영국이 소련에 대항해 자유를 성취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녀는 레이건이라는 둘도 없는 파트너를 만나 소련을 붕괴시키고 냉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녀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냉전에서 승리를 얻어낸 것은 우리 반공주의자들이었다. 승리를 얻어낸 것은 누구보다도 로널드레이건의 공이었다."

........................................................................................................................................

지구상에서 공산진영을 무너뜨린 위대한정치가는 "鐵의 여인" 마거릿과 로널드레이건이라는 것을 모르는이 없다. 문제는 해체와해된 공산주의자들이 아직도 그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데 있다. 대한민국 자유민주체제 안에서도 '사상의 자유'를 빙자하여 '민주'와 '민족'을 간판으로 내걸고 공산주의를 실천에 옮기려는자들이 분명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이 땅의 공산주의자들은 "빨갱이 아니냐?"에는 사색이되어 손사례를 친다. 자신들의 사상과 이념이 공산주의임을 모르겠는가? 다만 상대방을 속이고 '羊頭狗肉'을 주장하는 것뿐이다.

지켜보는이들은 대한민국 사회에서 공산주의자들이 누구인가정도는 쉽게 가늠하게 되었다.

 지난 10년에 걸쳐 '과거사정리'에 나섰던 사람들과 그 과정에서 인권회복(?)및 보상받은자들이 누구였던가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건국 60년사에서 이념적 反국가행위를 저지른자들을 죄없다하는이들이 누구겠는가? 이제는 쉬쉬하던 일도 숨어서하던일도 되레 큰소리치며 이적행위를 하며 '민족'에 덤터기를 씌우고 있는 상황이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이제 대한민국 사람들은 도둑맞은 말(言)들을 되찾아와야한다. '아름다운 가게'가 아름다운 일을 하는 것으로 믿고 골몰히 돕던손들을 놓고 그 돈들이 아름답게 쓰여졌는가, 살펴볼 일이고, '평화통일'이 전쟁없이 '적화통일'되는 것이라도 괜찮은 것인가? 숙고해볼 일이고, 과거 평등하게 잘먹고 잘살게 해준다던 사람들이 과연 제것 다 풀어내어 가난한 이웃과 함께 이어려운 경제난국에 함께 라면끓이며 살아주는지? 한 번 꼼꼼히 따져 볼 일이다.

이땅의 글 쓰는 義人들도 이제 좌우익, 좌편향 우편향따위의 말장난에서 벗어나야할것이다. 우리 시회를 누가 두부모 자르듯이 두조각으로 나눴었는가? 그럴리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대한민국국가정통성은, 자유민주주의 유일합법정부가 그 정체성이다. 대한민국내에서 김정일 추종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일 뿐이다. 친북이니 좌파니 해서 理念의 敵들을 물타기해서는 안 된다. 한반도는 대한민국 그 자체다. 자유진영이 승리한 것은 반공주의자들 때문이었다는 대처의 말이 진리일 뿐이다.

"공산주의도 공존해야한다"는자들은 대한민국 국민일 수가 없다. [자유, 진실, 정의]를 위한 전쟁에서 자유민주주의자들은 이미 승리를 거둔지 오래다. 이제는 공산주의자들을 공산주의자라고 불러야할 때다. 무엇이 두려워서 내조국 자유대한민국에서 공산주의자들의 눈치를 보고 산단 말인가? 다만 처벌과 척결이 필요한시점이다.

 

 

 

 

등록일 : 2008-12-07 (23:05)
트위터 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미투데이 미투데이    네이버네이버
더 많은 사람들이 이 글을 읽기 원하세요?
아래 배너를 눌러 네비 툴바를 설치 하세요


                         
스팸방지 :    (필수입력 - 그림의 영문, 숫자를 입력하세요)

 
헌재까지 결합된 것으로 보이는 마귀의 ...
[ 17-02-21 ]
[조갑제 칼럼]
[김성욱 칼럼]
[남신우 칼럼]
[홍관희 칼럼]
[수잔숄티 칼럼]
[박태우 칼럼]
[이동복 칼럼]
[김성만 칼럼]
[김필재 칼럼]
[김진철 칼럼]
[亨通者 칼럼]
[인권투사 칼럼]
[이사야의 회복]
[창조의 희망]
[구국의 시와 격문]
[구국의 예언]
글이 없습니다.



  사이트소개기사제보 ㅣ 개인정보보호정책 ㅣ 즐겨찾기 추가우리자료실
서울 특별시 강동구 길동 385-6 Tel 02)489-0877 ㅣ 사업자번호 : 212-89-04114
Copyright ⓒ 2007 구국기도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