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송합니다. 만나지 않겠다고 하네요." 그리고 며칠 뒤, 병원으로 레슬리를 찾아간 나는 뜻밖의 말을 들었다. 스테이션의 간호사는 내 손에 들린 꽃망울이 가득한 수선화(水仙花) 화분과 내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손이 무거워지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왜죠? 혹시 상태가 안 좋은 겁니까?" "아니에요. 레슬리는 잘 지내고 있어요." 갑자기 나빠지거나 한 건 아니라는 말에 조금 안정이 되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나는 대신 전해달라며 그녀에게 화분은 건네주었다. 이곳으로 오는 길에, 어쩐 일인지 꽃집이 다 눈에 들어왔다. 화려한 꽃잎들을 바라보다가 결국 집어든 것은 알뿌리가 단단한 노란 수선화 화분이었다. 해가 바뀌어도 매번 뿌리에서 새 잎이 돋는, 환한 노란 꽃으로. 레슬리를 만나지도 못하고 그냥 돌아서는 길에, 나는 복도에서 머리가 은발인 한 할머니와 마주쳤다. 보행 보조기구를 쓰고 있는 할머니가 불편하지 않도록 옆으로 비켜서다가, 그 분이 나를 물끄러미 보고 계신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예의상 고개를 숙여보이자 할머니는 동화 속에 나오는 할머니들처럼 인자한 얼굴로 웃으며 말씀하셨다. "레슬리 친구로구먼." "아, 네." 그러고 보니 이곳에 왔을 때, 레슬리와 이야기를 나누시는 모습을 몇 번 본적이 있는 것 같다. 할머니가 내 옆을 스쳐가며 하시는 말씀에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있었다. "찾아와주는 사람은 자네가 처음이야. 좋은 아이인데, 왜 그렇게 외롭게 지내는 가 몰라." 그런데 왜. 이제는 나조차 만나려고 하지를 않니.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하루 종일 풀려있는 나를 보고 티모시는 고개를 저었다. 한동안 나에게 다이영의 안부를 묻던 사무실의 동료들도, 이젠 그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나는 벌써 밤마다 악몽을 꾸고 있었다. 그동안 레슬리에게서는 연락 한 번이 없었다. 그런 식으로 일주일쯤 지난 후에 조용히 그가 찾아왔다. 묘지를 둘러보는 손님을 배웅하고 산책로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던 나는, 자신의 묘지 자리에 서있는 그를 발견하고 뛰다시피 다가갔다. "이거 돌려주려고 왔어요." 숨을 몰아쉬는 나를 보고도, 그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하는 입술도 나를 보는 눈동자도 모두 그대로였다. 그런데도 이상스럽게 그가 낯설다. 그는 내게 품에 안고 있던 수선화 화분을 들어보였다. 건네줄 때 꽃망울이 열려있던 수선화는 벌써 남김없이 피어있었다. "아저씨. 이런 거 되게 잔인해요." "..무슨 말이야." "나 같은 사람한테, 살아있는 거 선물하는 거 아니에요. 나 떠나고 얘만 혼자 남으면. 불쌍하잖아요." 오늘따라 하늘이 흐렸다. 회색의 베일을 두른 듯 희뿌연 시야 속에서, 그가 들고 있는 화분의 노란 수선화 꽃만이 촛불처럼 밝게 빛난다. 목이 메어왔다.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는 죽어. 하지만 지금 너는 살아있어. 살아있는 동안에는 적어도, 살아있는 것만 생각해야 하는 거 아니야?" 꽃은 지기 위해서 피어있는 것이 아닌걸. "자꾸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잖아. 나한테는, 그게 더 독이예요. 알아요?" 내게 떠안기는 것처럼 화분을 건네주며 그가 말했다. 눈을 질끈 감고 나를 보지 않은 채로 내뱉는 말들은 축축하게 젖어, 내 귓가와 마음에까지 달라붙었다. 내 팔에 안긴 화분에서 길고 낭창한 녹색의 꽃대가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조심스럽게 화분을 고쳐들고, 나는 그에게 비어있는 손을 내밀었다. "지금 이 순간들을 소중하게 여겨달라는 것뿐이야. 종착역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고 해서, 창밖에 펼쳐진 풍경까지 외면할 필요는 없는 거잖아." 내 손을 내려다보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젖어있는 눈동자를 향해 나는 웃어보였다. 언제나 그가 지어보였던 미소처럼. 그의 차가운 손가락이 머뭇거리다 내 손을 잡아왔다. "내가... 너무 욕심 부리는 거 아니죠?" 손가락의 깍지를 껴, 떨어지지 않도록 단단히 잡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내가 서로 마주 선, 흐린 하늘 아래 놓인 묘지는 산 자를 위해 조용히 침묵하고 있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땅에 묘지가 아닌 곳이 어디 있을까. 삶은 다시 죽음으로 덮일 때까지 죽음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곳에 묻힌 많은 사람들이, 남아있는 사람들의 삶 속에 남아있듯이. 비록 우리가 그 사실을 떠올리는 것이 일년에 한 번 뿐이라고 해도. "나중에라도 생각나면, 나도 제사라는 거 한 번 지내줘요. 그냥 술이나 한 잔 올려주면 되요. 이게 내 유언이에요." 그가 조용히 미소 지으며 내게 말했다. 그래, 그렇게 할께.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나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는 내게 돌려주었던 화분을 다시 받아들었다. 눈부시게 피어오른 꽃잎들을 가만히 쓰다듬으며 화분을 품에 안은 그가 돌아서서 길을 가기 시작했다. 내게 뒷모습을 보였지만 안녕이라는 인사는 하지 않았다. 먼 훗날을 위해서 작별인사는 아껴둘 생각이었다. ------------------------------------------------ 『a memorial day』 나는 수선화를 땅에 옮겨 심었다. 호스피스 직원에게 전화를 받은 것은 일주일 전이었다. 환자마다 가지고 있는 사망 후 핫라인(Hot-line)에 내가 가장 먼저 적혀있다고 했다. 그 전날 까지 나와 수선화를 기르는 방법에 대해서 얘기하던 그였는데도, 나는 이상스러울 정도로 놀라지 않았다. 막 퇴근을 한 직후였지만, 전화를 끊고 다시 사무실로 나온 나는 운반 팀에게 연락을 취해 함께 그곳으로 갔다. 나를 알아본 간호사가 내게 수선화 화분을 전해주었다. 그의 부탁이었다는 말과 함께. Leslie. G. Joo 나는 그의 이름 아래에 수선화를 심었다. 이전에 피었던 꽃들은 벌써 지고 없었지만, 봄이 돌아오면 다시 잎이 올라오고 꽃이 필 것이었다. 그리고 1년에 한번쯤은 자신을 기억해 달라는 그의 말 또한 매번 내 안에서 그의 기억으로 피어날 것이다. * a memorial day : 기일(忌日) * 퓨너럴 코디네이터(funeral coordinator)라는 직업은, 우리말로 찾자면 '장의사'겠지만. 실질적으로 하는 일이 다르기도 하고, 장의사라는 말의 어감이 껄끄럽기도 해서 그대로 표기했습니다. 퓨너럴 디렉터(funeral director)는 우리나라 같은 장례문화에서는 없는 직업이겠지요. * 네임플레이트 : 책상위에 얹어두는 명패(名牌) 스테이션 : 간호사들이 모여 있는 곳 다이영 : die young. 요절 ---------------------------------------------------------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는 죽어. 하지만 지금 너는 살아있어." 우리가 지금 살아있으매, 최상의 가치를 두고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작가의 동의를 얻어 인터넷에서 옮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