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날 이후로 두세 번 정도 더 만났다. 그를 만나기란 아주 쉬운 일이었다. 나는 하루의 대부분을 이곳에 있고, 그는 하루 종일 병원에 있으니 누구든 먼저 용기를 내어 찾아가면 그만이다. 따로 번거로이 약속을 잡을 것도 없었다. 뭔가 할 일이 남아서 만난 것은 아니다. 가까운 곳으로 드라이브를 가거나 그의 방이나 다름없는 병실에서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런 식의, 지극히 일상적인 순간들. 그리고 그는 여전히 나를 '아저씨'라고 불렀으며, 나는 그는 '레슬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한 10분쯤 후면 끝날 거예요." 어쩌다 이런 날도 있다. 주말인데 다른 약속도 없고. 전해주고 싶은 것이 있어 잠시 들렸더니, 아는 체를 해오는 간호사가 레슬리가 검사 중이라 방에 없다고 전해주었다. 그제서야 새삼 이곳이 호스피스라는 것을 깨달았다. 무슨 검사냐고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냥 그녀에게 알았다고 하고는, 그가 돌아올 때까지 로비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나는 아직도 레슬리가 무슨 병으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물어보면 대답해 줄지도 모르겠지만, 스스로 먼저 말하지 않는 이상 궁금해 하지 않기로 했다. 로비에는 나처럼 이곳의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사람들 몇몇이 무료한 표정으로 앉아있다. 그들은 놀랍게도 내가 여기서 만난 환자들보다도 더 삶에 의욕이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혹시 나도 그런 것이 아닌가 싶어 손으로 얼굴을 문질러 보았다. "어?" 의료시설이 있는 병원건물과 환자들의 입원병실만 있는 숙소건물을 연결하는 통로 쪽에서 레슬리의 모습이 나타나는 듯싶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분명 나와 눈이 마주친듯한 그가 걸음을 빨리해서 로비를 그냥 지나치고 있었다. 그를 뒤따라가려 일어서다가 멈칫했다. 레슬리는 하얀 환자복 차림이었다. 내가 처음 보는. 그 모습에. 가슴 한 구석에서, 종이 한 장이 바람결에 팔랑거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언제 왔어요? 오래 기다렸어요?" 한 십 분쯤 후, 내 앞에 나타난 레슬리는 여느 때처럼 생글생글. 아까 본 사람은 그와 닮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쉬울 정도였다. 질문을 이어내는 얼굴을 멍하게 바라보다가 나도 따라서 웃음을 지었다. "별로. 난 괜찮아." "음. 나도 괜찮아요." 아프지 않느냐고 물어볼 참이었는데, 그의 대답에 그러질 못했다. 내 얼굴 어딘가에 쓰여 있었나. 그의 대답이 의외였던 만큼 마음을 들킨 것만 같아 머쓱해졌다. 방으로 가요, 라며 나를 일으켜 이끄는 그에게서 향수냄새가 나고 있었다. 어딘가 낯선 진한 향기가. 그의 병실로 들어가자 레슬리는 차를 대접한다 하며 분주했다. 역시 병실보다는 방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곳이다. 병원 냄새가 나는 것이라고는 언제든지 링거를 달 수 있도록 한 침대와, 의료장비를 설치하기 위해 비워놓는 그 옆의 공간뿐이었다. 방마다 똑같은 간소한 가구와 가전제품들을 보면 기숙사 같은 느낌을 주기도 했다. 나는 작은 소파에 앉아 티 테이블 위에 들고 온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근데 그건 뭐예요?" 전기포트에 물을 끓이고 홍차티백을 꺼내다가, 바구니를 가리키며 그가 물었다. 나는 좀 쑥스러운 기분으로 내밀었다. 어제 전해 받은 소포는 한국에서 온 것이었다. 평소보다 부피도 크고 무거워진 상자 속에 들어있는 것들을 봤을 때, 문득 그가 생각이 났다. "한과야. 먹어본 적 있어?" "우와, 아니요. 처음 봐요. 과자 같은 거예요?" "응. 한국전통과자라고 할까." 레슬리는 어린아이처럼 와아 감탄을 연발했다. 선물에 잘 어울리는 반응이었다. 딸기향이 피어오르는 홍차와, 색도 모양도 가지각색인 한과에서 나는 달짝지근한 내음이 코끝을 온통 달게 만들었다. 바삭 소리가 나는 유과(油果)를 깨물다가 나를 보고 웃어 보이는 그의 미소까지도 달게 느껴졌다. "이런 건 어디서 팔아요?" 과자가루를 입가에 묻힌 채로, 레슬리가 물었다. 나도 모르게 어린아이에게 하듯 손을 뻗어 입가를 털어주었다.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도 알지 못하고. "파는 거 아니야. 한국에 있는 식구들이 보내 준 거." "어... 근데 내가 먹어도 되나." "걱정 마. 집에 아직도 많아. 워낙 많이 보내주셨거든." 나도 하나를 집어 들어 우물거렸다. 익숙한 맛이다. 내가 어릴 적부터 이모와 함께 떡집을 하신 어머니 덕분에, 나는 봉지에 든 과자보다 떡이나 한과를 더 자주 먹으며 자랐다. 내가 미국 이민 준비를 하던 때에도 가게 일을 하루도 거르지 않으시던 어머니는, 나의 출국날 색이 붉은 시루떡을 얹으셨다. 팥의 붉은 색이 잡귀를 쫓는다 중얼거리시면서. 어릴 적 크게 체한 뒤로 잘 먹지 못하는 시루떡을 내어주신 것은, 가족들의 품을 도망치듯 떠나는 큰아들에게 내색하지 못한 원망이었을 것이다. "아저씨." "응?" "고마워요." 과자를 우물거리다 말고 하는 말이었지만, 사뭇 진지하게 말하는 얼굴에 진심인 것이 느껴진다. 고작 과자 한 바구니에 들을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왠지 쑥스러워져 나는 대답 대신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내 동생이 지금 그의 나이만할 때도 잘 하지 않았던 행동이다. 온순하게 머리를 내어 맡기고 있던 그가 말했다. "아저씨는 정말 훌륭한 사람이에요." 갑작스런 말이 내용까지 놀라워 나는 웃어버렸다. 오래 얘기를 나눈 후에야 알게 된 것이지만, 이곳 태생이라는 그는 제법 능숙하게 한국어를 말하면서도 가끔씩 어울리지 않는 어휘를 쓸 때가 있었다. 영문도 모르고 눈만 깜빡이는 그를 보다가 웃음을 멈추고 말했다. "난 너보다 여덟 살 이나 많아." "그런데요?" "해놓은 것도 없이 이젠 젊지도 않다는 거지. 그런 말하기에는 네가 아깝다고." 네가 얼마나, 살아있는 매순간 멋지게 빛나고 있는지 모르는가 보구나. 비록 겨울의 찬 바람을 견디지 못하는 꽃이라도. 피어있는 동안 태양 아래서 얼마나 아름답게 반짝이는지. "아니. 아저씨가 더 훌륭해요. 8년이나 더 살았고. 앞으로도 더 살 테니까." 순간. 그를 만난 이후 처음으로, 그가 슬퍼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가볍게 떨리듯 웃음을 지으려 애쓰는 입술을 보면서 나는 따라 웃지 못했다. 곁에 앉은 그에게서 좀 전의 향수냄새가 조금 더 강하게 맡아진다. 그리고 그 향기 아래 눌리어 흐릿해진 병원 특유의 냄새까지도. 상쾌한 향수의 향이 어쩐지 씁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