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복싱 스타 로키 발보아로 분장한 미국 배우 실베스타 스탈론이 소련의 복싱 선수를 K.O. 시키는 내용의 영화 ‘로키 4편’의 화면을 배경으로 그 영화의 주제가를 연주한 음악 공연을 김정은(金正恩)이 관람하는 장면을 7월11일 북한 <조선중앙방송 TV>가 보도한 사실을 7월11일자 미국 뉴욕 타임즈가 기사화한 것을 가지고 국내 언론은 마치 기다리기나 했듯이 이것을 김정은이 이끄는 북한이 개방 쪽으로 선회하는 것을 시사하는 것으로 견강부회(牽强附會)하는 수선을 떨고 있다.
 
 이 같은 국내 언론의 보도 태도에서 필자는 도저히 역겨움을 누르기 어려운 경망스러움을 느낀다. 이번 뉴욕 타임즈 기사를 보면서 필자는 1970년대 초 남북적십자회담과 남북조절위원회의 두 갈래 남북대화를 추진하고 있을 때 겪었던 일들을 문득 회상하게 된다. 이들 회담이 진행되는 도중 우리측은 북측의 연락관으로부터 예상치 못했던 요구를 받게 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서울에서 회담이 있을 때마다 다른 일행과는 별도로 서울의 백화점으로 안내해 줄 것을 요구했다. 백화점으로 안내를 받은 그가 들린 곳은 남측의 유행가를 녹음한 테이프와 영화 비디오 가게였다. 거기서 그는 그가 지참한 목록을 가지고 다량의 노래 테이프와 영화 비디오를 구매해 가지고 돌아가는 것을 관례화했었다. 대금은 당연히 남측의 부담이었다. 그는 회담과 회담 사이에는 남북 직통전화와 팩스 전화로 빈번하게 유사한 요구를 되풀이 했고 우리측은 그때마다 그가 요구하는 목록의 노래 테이프와 영화 비디오를 구해서 공급해 주느라고 부산을 떨었다.
 
 이렇게 해서 북이 남으로부터 가지고 간 영화 비디오는 꽤 여러 편이었다. 예컨대, <미워도 다시 한 번>, <대원군>, <여고시절>, <내시>, <3일천하>, <석화촌>, <화녀>, <연애교실> 등 국산 극영화와 <남과 여>, <석양의 무법자>, <석양의 결투> 등 수입 극영화, 그리고 <서울>, <한국의 공업> 등 도큐멘타리들이 포함되었었다. 이 가운데서 걸작은 <미워도 다시 한 번>을 받아 간 북측이 그 뒤 <속 미워도 다시 한 번>•<속속 미워도 다시 한 번>•<속속속 미워도 다시 한 번> 등 <미워도 다시 한 번> 시리즈 4편을 모두 요구하여 받아 간 것이었다.
 
 우리는 도대체 북측의 누가 이렇게 영화 비디오와 노래 테이프를 수집해 가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북측의 대답은 이들 비디오와 테이프는를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의 요구에 따라 가져간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김정일이 평양에 ‘세계 최대의 영화 비디오와 음반 및 음악 테이프 라이브라리’를 가지고 있다”고 자랑했었다.
 
 이때 북측이 우리측으로부터 받아 간 음악 테이프에 수록된 가요 곡목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가고파>, <갑돌이와 갑순이>, <고향 그리워>, <고향만리>, <고향생각>, <고향의 봄>, <굳세어라 금순아>, <그리움>, <그 집 앞>, <금강에 살으리랏다>, <나그네 설음>, <나의 줄리엣>, <남성>, <내 마음>, <내 마음은 불타는데>, <눈물 젖은 두만강>, <달아달아>, <대지의 항구>, <대한 팔경>, <동백 아가씨>, <동심초>, <망향초 사랑>, <목포의 눈물>, <미워 하지 못하고>, <바다의 교향시>, <바위고개>, <뱃노래>, <번지 없는 주막>, <보리밭>, <봄이 오면>, <봄처녀>, <봉숭아>, <불효자는 웁니다>, <비내리는 고모령>, <비내리는 영등포>, <사공의 노래>,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사랑은 가고>, <사랑의 이정표>, <산들 바람>, <산유화>, <삼다도 소식>, <서울이여 안녕>, <선구자>, <선창가>, <섬마을 선생님>, <섬처녀>, <성불사의 밤>, <신라의 달밤>, <신라의 북소리>, <아주까리 선창>, <알뜰한 당신>, <애모>, <어머님의 마음>, <여자의 일생>, <연락선은 떠난다>, <옛동산에 올라>, <오부자의 노래>, <왕서방 연서>, <우리 애인 올드 미스>, <울고 넘는 박달재>, <울지 않는다>, <이별>, <잘 있거라 고모령>, <자장가>, <찔레꽃>, <체리 핑크 맘보>, <추억의 백마강>, <코스모스>, <쾌지나 칭칭 나네>, <타향사리>, <팔도 강산>, <페르샤의 밤>, <하숙생>, <한 송이 흰 백합화>, <해운대 엘레지>, <홍도야 울지 마라>, <황성 옛터>, <황포 돗대>, <황혼의 부르스>, <흑산도 아가씨>, <희망가>
 
 생전의 김정일이 영화광(映畵狂)이었다는 사실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김정일 자신에 의하여 1978년 북으로 납치된 뒤 7년간 북에 머물면서 영화를 제작하다가 1985년 탈북한 영화감독 신상옥•여배우 최은희 내외의 증언을 통하여 세상에 알려졌다. 신상옥•최은희 내외는 탈북 후 저술한 《김정일 왕조》와 《내레 김정일입네다》에서 영화광인 김정일의 면모(面貌)를 생생하게 증언해 주었다. 이에 의하면 김정일은 엄청날 정도로 많은 영화 필름을 수집하여 소장하고 있을 뿐 아니라 바깥 세계에 관한 그의 지식은 거의 전적으로 영화관람을 통하여 형성되고 있었다. 김정일의 영화에 대한 취미는 관람에 그치지 않고 ‘제작’에까지 미쳐서 북한 영화산업이 가지고 있는 한계성을 극복하는 길을 찾기 위하여 신상옥•최은희 부부를 납치했다고 직접 밝힌 것으로 신•최 부부의 저서는 기술하고 있다.
 
 신•최 부부는 북한에서 그들이 참석했던 연회에서는 김정일과 그의 측근들이 항상 남한의 가요를 열창하고 있었다고 그들의 저서에서 기술하고 있었다. 실제로 서울에서 열린 남북회담에 참가한 북측의 연형묵(延亨黙) 정무원총리(당시)나 김달현(金達玄) 무역부장(당시) 등 북한 요인들은 주석(酒席)에서 한국의 대중가요들을 익숙하고 유창하게 부르는 것이 예사였다. 물론 이들의 남측 또는 서방세계 영화 관람이나 남측 가요 감상 또는 노래하기는 북한의 개방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