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12월12일은 서울 워커힐에서 열린 제5차 ‘남북고위급회담’의 마지막 날이었다. 이 회담은 10일 북측 대표단이 판문점을 경유하여 육로로 서울에 도착한 뒤 11, 12일 이틀 동안 회담을 갖은 뒤 13일 북측 대표단이 다시 판문점을 경유하여 평양으로 귀환하는 3박4일 일정으로 진행되었다. 이날 오후 3시30분부터 워커힐의 한 회의실에서는 남북에서 각기 3명의 대표들이 참가한 실무대표회담이 시작되었다. 회담에는 남측의 송한호(宋漢虎), 임동원(林東源), 이동복(李東馥) 그리고 북측의 백남준(白南俊), 최우진(崔宇鎭), 김영철(金英哲)이 참석했다.

통상적인 고위급회담의 일정에 비추어 보면 이날 열린 실무대표회담은 이례적인 회담이었다. 서울과 평양에서 번갈아 개최된 고위급회담은 통상 방문하는 쪽의 대표단이 도착한 첫 날 오후 실무대표회담에서 회담 일정과 상대측 대표단의 체류 일정 및, 가능한 경우, 주요 회담 안건 타결을 위한 사전 조율을 시도하고 다음 날 오전 회담에서 쌍방 수석대표들의 기조연설을 청취하며 그 날 오후 다시 실무대표회담을 열어 회담의 현안 문제들을 타결시키기 위한 본격적 협상을 진행하고 여기서 이루어진 합의 내용들을 다음 날 오전에 열리는 두 번째 회담에서 공식적으로 합의사항으로 확정하는 절차를 밟는 것으로 회담은 전체적으로 종결하고 그날 오후에는 방문하는 쪽 대표단을 위한 마지막 일정으로 산업시찰 또는 관광을 실시하는 순서로 진행되었었다.

1991년12월 서울에서 열린 제5차 회담은 그렇게 진행되지 않았다. 본래 ‘남북기본합의서’의 내용에 관해서는 남북 간의 입장과 견해 차이가 워낙 커서 결코 용이하게 합의가 이루어지기 어렵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남측은 아직 김일성(金日成)이 생존했을 때임에도 불구하고 평양에서 실시간으로 남북대화를 직접 컨트롤하고 있던 김정일(金正日)이 서울의 북측 대표단에게 보낸 모사(模寫) 통신의 감청(監聽)을 통해 북측이 무엇인가 북측이 가지고 있던 알려지지 않은 사정으로 인하여 “북측의 종래 주장을 모두 양보해서라도” ‘남북기본합의서’ 내용을 이 회담에서 타결시키려 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남측은 북측으로부터 최대한의 양보를 강요하는 하나의 전술로 합의서 내용 타결을 위한 실무대표회담의 진행을 계획적으로 지연시키기로 했다. 이렇게 하여, 통상적으로는 고위급회담의 첫날 회담이 열린 11일 오후에 열렸어야 했던, ‘기본합의서’ 내용 타결을 위한 실무대표회담이 북측 대표단의 평양 귀환을 하루 앞두고 모든 회담 일정이 종결되었어야 했고 다른 회담 참가자들은 경기도 수원시의 삼성전자 공장 견학에 나서고 있는 시간이었던 12일 오후 3시30분에야 속개된 것이다.

남측에서는 남북 간에 의견 대립이 가장 첨예(尖銳)했던 5∼6개 사안에 대하여 양보할 카드를 준비하여 이 실무대표회담에 참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측이 준비한 이 양보 카드는 쓸 필요가 없었다. 이날 오후 4시30분 쯤 북측 대표단의 백남준(白南俊 본명은 白南淳으로 뒤에 외교부장을 지낸다)이 갑자기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치며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엇이 문젭니까. 해결합시다.” 그 뒤의 진행은 일사천리(一瀉千里)였다. 북측은 그 동안 고수했던 모든 주장을 게 바람처럼 철회하고 모든 쟁점 조항에 관하여 남측 제안을 전면적으로 수용했다.

불과 1시간도 안 되는 시간 안에 모든 현안들이 남측의 주장대로 타결되었다. 오후 5시30분 쯤 자리를 털고 일어나 기본합의서 내용의 완전 타결 소식을 발표하기 위해 밖에서 구름처럼 대기하던 기자들 앞에 선 필자의 머릿속 에서는 엉뚱한 상념(想念)이 돌연 고개를 들고 있었다. 이 역사적 합의문서가 과연 성실하게 이행될 것이냐는 회의(懷疑)였다. 필자는 뇌리(腦裏)에서 1215년 영국의 왕실과 귀족, 그리고 지주들이 합의했던 ‘대헌장(大憲章 Magna Carta)의 경우를 회상(回想)하고 있었다. 합의 주체들의 이행 의지가 없었던 '대헌장'은 결국 이행되지 않는 상태로 400여 년 동안 방치되었다가 1648년 영국의회가 ‘권리장전’(Bill of Rights)을 제정하면서 비로소 햇볕 을 보게 되었었다.

‘남북기본합의서’는 같은 해 12월31일 판문점에서 7시간 반의 마라톤협상 끝에 타결시킨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남북공동선언’(약칭 비핵화선언)과 함께 남북 쌍방의 내부적인 ‘비준’ 절차를 거쳐 다음 해인 1992년2월19일 평양에서 열린 제6차 고위급회담 석상에서 공식적으로 발효되었다. 그러나 두 합의문건 모두 거기까지가 고작이었다. 북한은 이 두 역사적 합의문건이 발효되기 무섭게 이를 사문화(死文化)시키고 그 이행을 보이콧하기 시작했다. 1992년8월 평양에서 열린 제8차 회담을 마지막으로 ‘남북고위급회담’은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고 ‘남북기본합의서’는 한 장의 휴지(休紙) 조각의 신세(身世)가 되었다.

‘남북기본합의서’의 이 같은 운명은 사실상 북한과의 ‘대화’가 갖는 한계(限界)를 보여 준 또 하나의 사례(事例)다. 1971년 ‘남북적십자회담(예비회담)’을 도화선(導火線)으로 하여 지난 40년간 남북 간에는 여러 가지 형태의 ‘대화’가 진행되어 왔다. ‘남북조절위원회’(1972 - 1973), ‘남북총리회담 준비회담’(1980 -1980), ‘축구’와 ‘탁구’ 및 ‘올림픽’을 위한 각종 스포츠 회담, ‘남북고위급회담’(1990-1993), ‘국회회담’, ‘경제회담’, ‘각료급 당국 간 회담’, ‘정상회담’ 등이 그것들이다. 이 모든 회담을 통하여 북측이 보여준 회담 전략은 천편일률(千篇一律)로 획일적(劃一的)이었다.

북한의 회담 전략에서 중요한 단계는 항상 ‘본회담’이 아니라 ‘예비회담’이었다. 북한은 ‘예비회담’ 단계에서 ‘전제조건(前提條件)’을 내세워 이를 통하여 북한이 노리는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는데 몰두(沒頭)했다. ‘본회담’을 성사시키는 대가로 북한이 노리는 전략적 목표의 수용을 남측에 강요하는 수법이다. 북한은 ‘예비회담’을 통하여 북한이 추구하는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던가 아니면 그 목표의 달성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했을 때라야 ‘본회담’ 진입에 동의했다. 그러나 ‘본회담’에 진입할 때도 북한은 ‘본회담’의 ‘의제’ 문안에 북한이 노리는 ‘결론’이 처음부터 함축되는 표현의 사용을 관철하던가, 아니면 ‘본회담’에서 특정 ‘의제’ 안건에 관하여 ‘합의’에 도달할 때 그 ‘합의’는 반드시 뒤에 ‘이행’ 단계에서 상반(相反)된 ‘해석’을 초래할 수 있는 ‘원칙적 합의’(Agreement in Principle)로 이루어지게 할 것을 고집했다.

그 결과로 남북대화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모든 ‘합의’는 발효되는 순간부터 이미 하나가 아니라 두 개의 상반되는 ‘합의’로 변질될 숙명(宿命)을 지니지 않을 수 없었다. 남북 쌍방이 서로 다른 ‘해석’을 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원칙적 합의’에는 북한의 분명한 노림수가 숨겨져 있었다. ① 일단 이루어진 ‘합의’는 ‘해석’의 ‘차이’를 표출시켜 이행되는 것을 가로 막고, ② ‘해석’의 ‘차이’ 때문에 이행이 불가능해 진 ‘합의’는 조만간 사문화(死文化)시키거나, ③ ‘해석’의 차이를 극복하기 위한 ‘재협상’을 강요하고 이 ‘재협상’ 과정에서 또 다시 ‘전제조건’ 놀음을 벌여서 남측으로부터 추가적 ‘양보’를 강탈하던가 아니면 새로운 ‘원칙적 합의’를 생산하며 ④ 이 같은 과정을 되풀이 반복함으로써 기존 ‘합의’의 실천이 없거나 북한이 허용하는 내용으로 부분적인 이행만 선택적으로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하나의 ‘합의’를 또 하나의 새로운 ‘합의’로 끊임없이 반복하는 악순환을 되풀이 하는 것이다. 북한은 이 같은 악순환을 되풀이 하는 과정에서 북한 특유의 선전선동 술로 개방사회인 대한민국의 여론을 끊임없이 흔들어서 남한 사회의 분열을 획책하는 공산주의자 특유의 대화기법을 집요하게 추구했다.

냉전(冷戰)시기 모든 공산국가들의 공통된 이 같은 협상전술에 관하여 미국의 프레드 찰스 이클레 박사는 “공산주의자들과 협상할 때는 절대로 ‘원칙적 합의’는 회피해야 한다.”고 경고했고 1951년부터 1952년까지 한국전쟁 휴전협상 유엔군 측 수석대표였던 C. 터너 조이 제독은 그의 명저(名著) “공산주의자들의 협상기법”(How Communists Negotiate)에서 “상호주의에 입각한 상대측의 양보가 없는 한 일방적 양보는 금물(禁物)이다” 공산주의자들의 성실성이나 ‘선의(善意)’에 기대를 걸어서는 안 된다” “공산주의자들이 협상을 희망할 때 우리는 오히려 압력을 강화해야 한다.” “우리가 합의를 서두르면 상대방은 그것을 우리의 약세(弱勢)로 오판(誤判)한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우리가 결코 무력행사를 포기한다는 신호를 보내서는 안 된다” 등의 경구(警句)를 남겨 놓았다.

사실은, 1992년의 ‘남북기본합의서’는 1972년의 ‘7.4 남북공동성명’과 2000년의 ‘6.15 선언’ 및 2007년의 ‘10.4 선언’ 등 그 밖의 모든 다른 남북 간 합의 문건들과 유일하게 구별되는 ‘구체적인 합의문건’이었고 바로 그 때문에 북한은 이 합의서에 서명할 때 사용한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이 합의서를 사실상 방기(放棄)하여 사문화(死文化)시키는 폭거(暴擧)를 서슴지 않았다.

그 뒤에도 우여곡절(迂餘曲折)을 거듭했던 남북관계는 지난 3월26일 서해 백령도 근해에서 발생한 북한 어뢰에 의한 ‘천안함’ 폭침(爆枕)으로 사상 최악의 진통(陣痛)을 겪고 있는 중이다. 이명박(李明博) 대통령은 5.24 특별담화 발표로 한 때 북한의 김정일(金正日) 독재정권에 대한 단호한 입장을 표명했었다. 그러나 최근의 남북관계는 이명박 정부가 5.24 특별담화를 사실상 ‘종이호랑이’로 만들면서 다시 대북 유화(宥和) 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필자는 어쩌면 머지않은 장래에 남북 간에 ‘7.4 남북공동성명’과 ‘6.15 선언’ ‘10.4 선언’ 류의 또 하나의 ‘원칙적 합의’를 담는 합의문건이 출현(出現)하는 것을 목격(目擊)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憂慮)가 필자만의 것이 아닌 것이 아니냐는 불안(不安)을 떨어 버리지 못한다. [끝]

<양지회보> 2010.11월호 용 寄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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