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제 벤츠 방탄차로 지난 주 평양을 다녀 온 노무현 대통령은 그의 여행 후속 조치에 바쁜 것 같다. 그는 지난 5일 임시 국무회의에서 “10·4선언이 다음 정부에서 흐지부지 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걱정했다. 괜한 걱정은 아니다.
노 대통령은 앞으로 10주 내에 한국의 최고 권좌를 사실상 떠난다. 그의 마음이 착잡하고 조급해질 만하다. 취임 1년 남짓 만에 탄핵재판에 회부된 데 이어 ‘수도이전’ 위헌결정을 받았고, 특히 임기 말에 측근들의 게이트급 비리로 얼룩진 그가 역사를 의식하다보니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북의 세습 왕조 독재는 남으로부터 불편하지 않게 계속 우려내야 하는 일방 남의 제왕적 권력은 북과 제휴하여 비정(秕政)의 뒤탈을 없애야 한다. 어떻게 해서라도 남에서의 정권 변동을 막기 위해 짜낸 남북정치의 특별 기획물이 10·4선언이다.
평화를 빙자하여 평화를 왜곡하고 평화를 건드린다. 남북은 면피용(免避用) 외교무대에 불과한 6자회담에서의 합의가 “순조롭게 이행되도록 공동으로 노력하기로 했다”는 전형적 면피로 북핵을 피해갔다. 지난 달 11일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서) 북핵 얘기하라는 것은 가서 싸우고 오라는 뜻”이라고 노 대통령이 그의 속내를 드러낸 그대로다. 노·김 간의 이번 만남은 서로가 북핵을 터부로 취급, 남이 북을 핵무기국가로 ‘묵인’한 격이 됐다. 평화의 왜곡이다.
7년 전에 사실상의 국고 강탈로 매수한 6·15공동선언에 따라 실컷 퍼준 것이 모자라 이번에는 북한을 위해 한국의 서해에 공동어로수역을 지정하고 해주 직항로를 열어주기로 작정했다. 155마일 휴전선에 따라 남북의 땅이 갈라진 이래 지난 54년 동안 서해 바다의 경계로 확립된 북방한계선(NLL)을 난데없이 건드린다. 그동안 유지된 긴 평화의 가치를 모르고 ‘평화수역’이란 미명 아래 평화를 교란할 평지풍파다.
노·김 간의 결탁은 과연 통이 큰 남북 권력자들 간의 작품답다. 낙서하듯이 열거한 대북 경제협력 사업은 듣기만 해도 현란하다. 노 대통령의 말로는 그 비용이 ‘크게 드는 것이 없을 것’이라는데도 산업은행의 추산으로는 60조원에 달한다. 100만 이상의 서민에게 아파트를 구해줄 수 있는 거액이다. 실제로 얼마의 재원을 어떻게 조달할지에 관해 어림잡은 것도 없이 다음 정부에 짐을 떠맡기는 권력의 오만이다.
남북의 권력이 거짓말과 헛소리를 버리지 못하는 그 한계가 10·4선언에 노출돼 있다. 35년 전의 7·4공동성명 이래 남북은 “사상과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상호 신뢰 관계를 만든다고 말해왔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차이는 더 벌어졌다. 사상과 제도가 같아져야만 상호 신뢰가 쌓인다. ‘우리민족끼리’라는 것은 거짓말이다. 현행 정전체제를 이른바 평화체제로 구축하기 위한 ‘3자 또는 4자 정상회담’도 ‘우리민족끼리’로는 안 되는 것이 자명하다.
그러나 헛말이 아닌 것도 없지 않다. 오는 11월 평양과 서울에서 각각 남북 국방장관회담과 총리회담을 개최하여 대선 정국을 장악하려는 기도가 그 한 가지다. 특히 TV로 하여금 ‘민족의 바람(族風)’을 일게 하여 범여 대선 후보를 띄우는 드라마의 흥행효과는 무시하지 못할 것 같다.
더욱이 앞으로는 ‘남북의 정상들이 수시로 만나기로 했다’는데 ‘수시로’의 함의가 석연찮다. 설마 노·김 간의 재회동을 함축했을 리는 없겠지만 2002년 대선의 마지막 길목에 나타난 촛불데모 같은 이변(異變)이 재연되지 않는다고 누가 단언할 수 있는가. “남북대화 하나만 성공시키면 다 깽판 쳐도 괜찮다”던 노 대통령의 ‘깽판’은 그가 하산한 때에 끝났다고 안심할 수 있을 것이다. 지칠 줄 모르는 권력놀음이 고이 끝나지 않을 것 같기 때문에.
이장춘(외교평론가, 전 외무부대사)
출처:http://freedomkorea.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