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정권의 핵심실세는 임하룡이다.”라는 말이 여의도 정치판에서 회자된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물론 80년대 인기 개그맨 임하룡 씨가 아니라, 청와대 핵심요직 3인방인 임종석 비서실장, 장하성 정책실장, 정의용 안보실장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중에서도 단연 임종석 비서실장의 존재감이 커 보인다. 지난 10일 임 실장은 국회 및 야당대표들을 향해 함께 평양회담에 가자며 갑작스런 공개 제안을 했다. 국회 의장단 및 야당 대표들이 불쾌감을 나타내며 거절하자, 11일에는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당리당략과 정쟁의 한국정치’ ‘꽃할배같은 신선함으로 다가오는 원로급 중진들을 희망한다’는 등의 정치훈수를 하면서 또다시 야당을 압박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임종석 비서실장만큼 외교, 안보, 인사, 행정 등 다방면에서 활약했던 사례가 있을까 싶다. 그것도 뒤에서 조용히, 드러내지 않게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전면에 나서서 직접 지시하고 업무를 추진하는 ‘비서실장’이 있었는지.
‘비서’는 그야말로 선출된 권력인 대통령을 보좌하는 역할이다. 정부조직법에 의하면 ‘대통령비서실장은 대통령의 명을 받아 대통령 비서실의 사무를 처리하고 소속 공무원을 지휘ˑ감독한다’고 되어 있다. 즉 대통령을 실무적으로 보좌하는 일을 담당하고, 그 지휘권은 비서실 소속 공무원들에게만 영향을 끼친다.
국무총리를 비롯한 각 부처 장관에 대한 지시와 감독권은 오직 대통령만 갖는다. 정부조직법에 따르면 대통령 지휘감독권은 보조기관인 국무총리와 각 부처 장관으로 이어진다. 즉, 대통령이 국무회의나 수석보좌관회의에서 말한 지시 사항이 국무총리를 통해 각 부처 장관에게 내려가는 것, 이것이 정상적인 지시·보고 라인이다. 비서실장과 안보실장 등은 다 대통령 보좌기관으로 장관에 대한 지휘 감독권이 없다. 즉 비서실장이 나서서 각 부처 또는 국회를 향해 이래라 저래라 할 권한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 출범 후 임종석 비서실장의 행보를 보면 이런 조직 체계를 거스르는 월권행위가 많이 보인다. 논란의 소지가 있는 그의 행적들을 한번 돌아보자.
1. ‘적폐청산 TF’를 만들라는 공문, 비서실장 명의로 작성돼 19개 부처 장관에게 발송
문재인 정부는 지난해 7월 19일 ‘100대 국정과제’를 선정해 발표했다. 1번 과제가 ‘적폐의 철저하고 완전한 청산’이었다. 청와대는 과제 발표 다음날인 20일 정부 부처·기관 19곳에 공문을 보냈다. 대통령 명의의 공문이 아닌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 명의였고, 비서실장의 직인이 찍혀있었다. 그 내용은 ‘부처별로 적폐청산을 위한 태스크포스(TF)를 7월 24일까지 구성하고 현황과 향후 운영 계획을 회신하라’는 것이었다. 공문을 보낸 곳은 정부 17개 부처 중 법무부를 제외한 16곳과 국가보훈처 공정거래위원회 금융위원회 3곳이다.
이 공문에 따라 국방부(군 적폐청산위원회), 보건복지부(불합리한 제도·조직문화 혁신 TF), 공정거래위원회(법집행 체계 개선 TF) 등 총 13개 부처·정부 기관이 적폐청산 TF를 만들어 운영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 일부 부처는 청와대의 공문은 받았지만 적폐청산 TF를 따로 꾸리지 않았다.
임종석 실장 명의의 이 공문은 2017년 국정감사에서 논란거리가 됐다. 위원회별 국감마다 계속 문제제기가 이어졌다. 유민봉 자유한국당 의원은 행정안전위원회 국감에서 “임종석 비서실장이 각 정부부처 장관에게 부처별 적폐청산 TF를 구성하라고 지시한 것은 정부조직법에 규정된 지시·보고 라인을 어긴 월권 행위”라고 주장했다.
자유한국당은 당내 법률자문을 받아 2017년 10월 24일 임종석 비서실장과 해당 공문을 만든 백원우 청와대 민정비서관을 직권남용으로 검찰에 고발했다. 임 실장의 행위가 위법하다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들었다.
『 첫째, 적폐청산 TF 또는 위원회 구성은 청산대상이 될 공무원 또는 시민 기본권을 침해할 가능성이 지극히 높은 공권력 행사로 이러한 공권력 행사에는 헌법상 법률 유보 원칙에 비춰 반드시 법률적 근거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 시행되고 있는 TF 또는 위원회 활동은 이러한 근거가 없다. 이는 정당한 권한을 넘어선 부당한 행위로 직권남용에 해당된다.
둘째, 대통령 비서실장은 대통령의 직무를 보좌하는 정무직 공무원일 뿐 각 부처에 지시를 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 비서실장이 각 부처에 본인 명의로 공문을 하달한 것은 명백히 본인의 권한이 아닌 대통령의 권한을 행사한 것이다. 이는 직권남용죄에 해당한다.』
형법 제123조가 규정하는 ‘직권남용죄’는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사람의 권리행사를 방해함으로써 성립하는 죄를 말한다. 단순한 직권남용이 아니라 권리행사를 방해해야만 성립된다. ‘권리행사를 방해받은 사실’이 있는지 여부는 각 적폐청산위원회의 활동 내용에 따라 유동적인 듯하다.
현재 각 부처에 구성된 각종 적폐청산위원회는 모두 임 실장 명의의 공문에 따라 만들어졌는데, 그 근거법이 불분명해 처음부터 활동의 위법성 논란이 있어왔다. 적폐청산 TF가 정부조직법, 행정기관 소속 위원회 설치 운영법 등에 근거를 둔 행정위원회가 아닌 단순 자문기구에 불과한데도 조사를 위한 인력, 사무실 등 행정·재정적 지원을 받는 것은 ‘예산의 불법 전용’ 등 현행법 위반이라는 지적이 많다.
또한 위원회의 활동이 사실상 수사에 가깝고 실제 각 부처별로 공무원에 대한 검찰고발이 이어지고 있다. 사실상의 수사를 하는 기구를 만들려면 母法에 근거한 명백한 위임 및 활동범위 등에 대한 규정이 있어야 하는데, 현재 관련 규정이 미비하다. 그리고 위원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참여연대를 비롯한 각종 시민단체와 민변, 노동계 출신 인사들이다. 국가공무원법에 따라 임명된 정식 공무원이 아닌 사람들이 국정원 서버와 같은 기밀 자료까지 접근해 과거 정부활동을 파헤치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따라서 이런 위법성이 있는 위원회 활동으로 피해를 입었다는 사람이 등장할 경우, ‘직권남용죄’로 연결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2. 비서실장이 국방부 장관에게 공개적 ‘엄중 주의’ 조치
2017년 9월 19일 정의용 안보실장은 임종석 비서실장과 상의한 뒤 송영무 국방부 장관에게 공개적으로 ‘엄중 주의’ 조치를 취했다. 전날 송 장관이 국회 국방위에서 한 발언을 문제 삼은 것이다.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특보에 관한 질문이 나오자 송 장관은 “그분(문정인)은 학자 입장에서 떠드는 것 같은 느낌이지 안보특보라든가 정책특보가 아닌 것 같아서 개탄스럽다”고 비판하고, 800만 달러 규모의 대북 지원 시기에 대해 “굉장히 늦추고 조절할 예정이라고 (통일부로부터) 들었다”고 말했는데 이를 문제 삼았다.
청와대는 공개 브리핑을 통해 “국무위원으로서 적절하지 않은 표현과 조율되지 않은 발언으로 정책적 혼선을 야기한 점을 들어 엄중 주의 조치했다”는 메시지를 기자단에 보냈다.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미국 뉴욕 방문 중이어서, 안보실장과 비서실장이 주의 조치를 취한 후 대통령에게는 사후(事後) 보고를 한 것이다.
안보실장과 비서실장은 대통령의 비서들이다. 송 장관은 대통령의 참모이면서 국무위원이다. 그러니까 대통령의 지시가 없는데도 두 비서가 장관을 혼낸 것이다. 물론 송 장관의 국회 발언은 청와대 입장에서 보면 부적절한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내각을 통할하는 총리마저 제치고 대통령 비서들이 장관에게 경고하는 건 명백한 월권이라는 지적이 많았다. 또한 공개적으로 ‘주의 조치’를 취한 것도 이례적이었다.
당시 송 장관은 결국 하루 만에 자신의 발언에 대해 사과했다. 송 장관은 “발언이 과했다. 사과한다”며 “청와대로부터 조심하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내각 위의 청와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3. 통일부 장관을 대신한 임종석 비서실장
4·27 판문점 회담 개최과정에서 임종석 비서실장의 존재감은 한껏 부각됐다. 정상회담 준비위원장으로서 준비 과정을 총괄했던 임 실장은 회담 이후에는 판문점 선언의 이행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핵심 현안인 남북관계 관리인으로 나선 모양새다.
임 실장은 4월27일 오전 군사분계선을 넘어 판문점 남측으로 내려온 김정은 측에게 수행원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인사들 중 가장 먼저 나서 주목을 끈 바 있다. 수행원들 맨 앞에 선 임 실장 뒤에 조명균 통일부 장관, 강경화 외교부 장관, 송영무 국방부 장관, 서훈 국정원장, 정의용 안보실장, 정경두 합참의장, 주영훈 청와대 경호처장, 윤영찬 청와대 국민소통수석, 조한기 청와대 의전비서관 순으로 섰다.
의전서열로만 치면 수행원 중 정의용 실장이 가장 먼저 인사에 나서야 했지만 임 실장이 가장 앞줄에 섰다. 그는 김정은 여동생 김여정에게 먼저 다가가 악수를 청하기도 했다.
이후 4·27 판문점 회담 개최 당일 회담장의 자리 배치 구도도 묘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가운데에 자리 잡고 남북 양측에서 각각 임 실장과 서훈 국가정보원장이,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과 김여정 제1부부장이 참석했다. 배석자의 급과 격을 맞추는 좌석배치의 프로토콜대로라면 북측의 김영철 부위원장 건너편에는 서훈 원장이 앉는 게 자연스럽지만 서 원장 자리에 앉은 것은 임 실장이었다. 당시 정부 당국자는 “회담장 자리 배치는 대통령 의전과 관련된 사항으로 청와대에서 결정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2월 평창동계올림픽 당시 북한 김정은의 특사 자격으로 김여정과 북측 고위급 대표단이 남한에 내려왔을 때는 통일부 장관이 아닌 임종석 비서실장이 비공식 환송만찬을 1시간30분 동안 주재했다. 또한 청와대 기념촬영에서도 임 실장이 문 대통령 바로 옆에 섰는데, 모두 이례적이라는 언론의 지적이 있었다.
4. 국회를 향한 비서실장의 거침없는 공개발언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은 2018년 4월 4일 개헌안 처리를 위한 국민투표법 개정을 국회에 요구했다. 예정에 없던 ‘국민투표법 개정 촉구에 대한 입장문’ 발표를 통해 “(야당이) 개헌의 진정성이 있다면 국민투표법 개정을 우선 진행해야 한다”며 “국민투표법은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으로 2016년부터 효력이 상실돼 2년3개월째 국민투표 자체가 불가능한 상태”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를 방치하는 것은 국민의 투표권을 박탈하는 것”이라며 “이를 바로잡지 않고서 헌법기관의 책무를 다한다고 볼 수 없고, 국회의 직무유기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지적했었다.
당시 법무부 장관이 아닌 청와대 민정수석이 공개했던 개헌안은 청와대의 ‘나홀로’ 작품이었다. 거기에 비서실장이 직접 나서 국회에 이래라 저래라 훈시한 모양새가 되어 야당의 반발이 많았다. 청와대와 국회 간 의사소통 문제라면 정무수석이 담당이지만 정무수석조차 국회에 대놓고 요구를 하는 경우는 드물다.
국회는 대통령을 정점으로 하는 행정부, 법원과 함께 3권 분립의 한 축을 담당하는 헌법기관이다. 그런 국회에 대통령 비서가 직무유기 운운하는 것은 부적절함을 넘어 월권이라는 주장이 야당에서 많이 제기됐다.
이 외에도 지난 4월 김기식 금융감독원장이 외유성 출장으로 사퇴했을 당시에도 임 실장은 직접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위법성 여부를 질의하고, 김 원장의 도덕성이 의원 평균 이하인지를 판단해 보겠다며 전ˑ현직 국회의원의 해외출장사례 전수조사를 직접 지시하는 등 야권에 대해서도 매우 투쟁적인 모습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