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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7월 7일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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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 꼬리 없는 짐승들의 눈빛(14)
그들의 눈빛 그리고 탈출
이순옥 탈북증언 
<모범수로 출소한 ‘악질 반동’>


교화소에 입소하면 신입자 방 생활을 13~15일간 거친 후 공장에 보내는 것처럼 출소 전에도 15일 간 만기자 방 생활을 거치게 되어 있다. 만기자는 교화생활에서 최종적으로 사상검토를 받는 것이다.


첫째 총화로는, 위대한 수령님과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의 배려로 교화생활을 불편없이 잘 하고 사상개조를 잘했다고 해야 한다. 그리고 시기별 당 정책 학습을 시킨다.


그 다음으로는 교화소에서 일한 것, 보고 듣고 느낀 점에 대해서 비밀을 누설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고 손도장을 찍어야 한다. 그 서약서에는 “만약 석방 후 교화소 내의 생활 비밀을 누설했을 경우에는 다시 교화소에 수감시킨다”고 지적되어 있다.

<“출소 후 수령님의 크나 큰 은덕에 보답... 목숨 바쳐 일 하겠다” 서약>

만기자들이 마지막 검토를 받을 때 노동이 힘들었다 든지 생활모습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경우는 다시 독방 처벌을 받게 되는 것이다. 또한 만기자는 절대로 다른 사람의 부탁을 받지 말아야 한다. 항상 입버릇처럼 “출소 후 수령님의 크나큰 은덕에 보답하기 위해서 목숨 바쳐 일하겠다”고 해야 한다.


보통 교화과 지도원이 만기자들을 만나 담화하고 출소시킨다. 그런데 내 경우엔 이례적으로 교화소 소장이 직접 나와 무려 다섯 번이나 담화했다. 소장은 나에게 “순옥이, 네레 몇년 간 좋은 일을 많이 했어. 국가에 많은 리익(이익)을 주었어. 네레 출소하면 교화생활에서 사상개조를 잘 했다는 문건을 담당 안전부에 띄우갔어. 네레 사회에 나가서도 예전처럼 일 잘하라우. 당에 끝까지 충성해야 진짜 일꾼이디”라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지껄여댔다. 그는 나의 심리상태가 어떤지를 타진해보려고 며칠에 한 번씩 나타나서는 말을 시켜 보는 것이다.

<수감여성 90%는 남편에게 이혼당해>

만기자 방에는 함경남도 덕성의 혁명화 관리소에서 온 모녀가 있었다. 아버지를 따라 덕성관리소에 갔는데 농삿일을 하면서 강냉이를 몇 차례 훔쳐먹은 것이 죄가 되어 모녀가 3년형을 받고 왔다. 다행히도 모녀는 형기를 마치고 살아서 출소하게 되었다. 그들은 매우 기뻐했다. 그런데 어느 날 담화하고 돌아와서 사회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다시 혁명화 관리소에 보내지게 되었다고 했다. 그들은 다시 구속자의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다. 교화소에서 형을 마쳤지만 자유의 몸이 되지 못하고 평생을 혁명화 관리소에서 살아야 했다. 교화소 안전원이 그들을 호송하고 덕성까지 가서 관리소에 인계한다고 했다.


교화소에 수감되었던 여자들 중 90%는 남편에게 이혼을 당했다. 여자가 잡혀가면 남편들은 도시에서 농촌으로 추방된다. 그래서 남편들이 아내가 잡히면 이혼 청구부터 한다. 해당 재판소에 이혼서류만 내면 여자의 동의 없이도 이혼이 성립된다.


그러니 혹 출소되더라도 그들에겐 가정이 없고 보호자도 없는 것이다. 그들은 대충 교회소에 오기 전에 살던 지방에 배치된다. 교화소 출소자들에겐 직장도 힘에 부치는 건설, 탄광 같은 곳으로 정해진다. 집도, 옷도, 먹을 것도, 자식도 없는 데다 몸은 허약해져 따끈한 밥 한술 얻어 먹기 힘드니 설사 살아서 나왔다고 해도 출소 얼마 후 죽는 사람이 많다.


교화소에 갔다 온 사람들이 오래 살았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출소하는 날인 1992년 12월 23일 아침 소장이 다시 나를 찾았다. 나는 감방 복도에 나와 찬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수그리고 앉았다. 가슴 속에서 울분이 소용돌이쳤다. 그러나 참아야 했다. 그때는 참는 것이 이기는 것이었다. 몇년 동안 잘 참아와서 오늘이 있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참았다.

<마음과는 다른 말 했더니 만족 해 하는 교화소장>

소장은 나에게 “네레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으면 하라우”라고 했다. 나는 “위대한 수령님과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의 배려로 사상개조를 잘 했으며 앞으로는 두 번 다시 범죄를 저지르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는 교화소 내에서 내가 한 일을 비밀로 간직하고 무덤까지 가지고 가겠노라고 마음에 없는 말을 했다.


나는 이미 북한의 사회체제에 대한 환멸감을 뼛골 깊이 체험했기에 “속아 살아온 내 인생이 가엾다. 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 나가면 무작정 도망가리라”는 결심이 확고히 서 있었을 때 였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소장은 내 말에 너무 좋아서 축 처진 볼따귀를 흔들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뒷짐을 지고 복도를 뚜벅뚜벅 구둣소리도 요란하게 왔다 갔다 하며 위풍을 세우느라고 무던히도 애를 쓰는 것 같았다.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소장 선생님에게 한마디만 하겠다”고 말했다.


“소장 선생님! 제가 종합 계산공으로서 직분을 잘 지켜 국가에 많은 이익을 주었다고 하는데 그러면 그 이익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국고에도 납부되지 않았고 인민들에게도 가지 않았습니다. 저는 국가에 조금이라도 보탬을 주려고 머리를 짜 가면서 노력했지만 그렇게 절약한 그 많은 양의 천으로 어린이들에게 옷 한 가지라도 만들어 공급한 것이 없습니다. 저는 이전이나 지금이나 당에 대한 충성심은 변함이 없이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이곳의 비밀은 무덤까지 가지고 가겠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그런 현상들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소장은 얼굴색이 신중해지며, 내 말을 끝까지 듣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나 소장이 그때 진심으로 나의 말을 받아들여 앞으로 참작하려고 그랬다고는 믿지 않는다. 다만 자기들의 온갖 비리를 세상에 나가 폭로하는 것이 두려워 나의 의견을 접수하는 체 한 것이다.

< `철 대문을 나오니 아들이 달려와
   “어머니, 살았구만요! 이젠 됐어요. 됐어요...>


감방 안전원의 “832번 이순옥 나와!”라는 고함소리에, 나는 너무나 바라고 고대했던 시각이었기에 허둥지둥 발이 어디에 놓이는지도 모르게 따라 나섰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심장이 터질 것만 같이 쿵쿵 뛰었다. 야, 오늘 같은 날이 있긴 있구나.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믿기지 않았다.


교화소에 수감되던 날 반 정신이 나가서 괴물처럼 가로막힌 철문을 들어섰는데, 내가 이 지옥에서 살아서 다시 철문을 나서게 된 것은 정말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사람의 정상적인 머리로는 도무지 할 수 없는 잔인한 일들을 매일같이 겪고서야 나는 해방된 것이다.
철대문을 나서 바깥 정문에 나오니 아들이 달려왔다.
“어머니, 살았구만요! 인젠 됐어요. 됐어요.....”
동철이는 눈물 범벅이 되어 말을 잇지 못했다.
바깥 정문 마당에는 소장 이하 재정과장, 공장관리과장 등이 나와 있었다. 계획과장은 동철이를 보고 “순옥이, 아들 잘 두었구나. 어머니 몸 보신 잘 해 줘 일 많이 했어.”라고 말했다.
소장도 덧붙여 “순옥이는 그래도 행복하다. 아들이 데리러오고... 나가거든 몸조리 잘하고 당과 수령님께 충성 다하면서 살라우.”라고 말했다. 교화소 문을 나설 때 소장이 하던 그 말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순옥이는 그래도 행복하다. 아들이 데리러 오고...”

<아들에게 한 첫마디, “더 이상 이 땅에 못 살겠다”>

차가운 겨울날씨에 그날은 유난히도 하늘이 맑았다. 마치 하늘도 나의 석방을 기뻐하는 듯 싶었다.
나의 출소는 교화소가 생긴 이래 처음 있는 일이라고 그 날 소장이 말했다. 나의 경우와 같이 모범수로 죄수를 석방하는 일은 북한에서는 아주 드물게 있는 일이라고 한다. 간혹 만기를 채우고 출소하는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교화소 간부들이 모두 나와서 배웅해주는 것은 처음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간부 출신이고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동안 종합계산공을 하면서 개천 교화소에서 알게 된 엄청난 비밀을 감추기 위해 더더욱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교화소를 벗어나자 나는 아들의 손을 잡고 무작정 말했다. “나는 이제 더는 이 땅에 못 살겠다. 더러워서 못살겠다. 중국이든 어디든 가자.”


아들은 몇 년만에 만난 어머니의 첫마디 말이 그러니 화들짝 놀라는 것이었다. 곧 이어 불같이 화를 냈다.


“아무리 어머니가 억울하게 당했다고 해도  어떻게 그런 말을 함부로 할 수 있습니까. 아직도 정신을 덜 차렸나요? 이렇게 살아 나온 것만 해도 다행인데 앞으로는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교화소의 참상은 북한 인민들도 모른다>

동철이는 나를 진정시키며, “이제 자유의 몸이 되었으니 어머니와 우리 가정의 억울함을 당에 신소하여 바로 해명하면 된다. 일이 일군들의 개인적 앙갚음에서 비롯된 것이니 어머니의 억울함은 당에서 제대로 해명해 줄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너무나도 순진한 아들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이 세상사람 누구든 직접 그 현장을 체혐해 보지 않고서는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죽기 전에야 어떻게 그곳의 일을 잊을 수 있겠는가, 나는 그때 벌써 ‘악질반동’이 다 되었다.


나는 그때 가죽에 악만 남은 몰골이었다. 그렇게 이빨을 사려물고 살았기에 목숨을 부지하고 바깥 하늘을 볼 수 있었다. 그 때 심정은 정말 복잡했다.


출소 직전 개천교화소 남녀 6천여 명을 모아놓고 교화소 부소장이 “너희들도 순옥이처럼 열심히 일하면 빨리 나갈 수 있다”고 선전할 때 모여 앉은 수감자들은 푸른 불빛이 튀는 눈길로 일제히 나를 쳐다보았다. “네가 나가거든 이곳의 참상을 세상사람들에게 꼭 전해달라”고 호소하는 눈빛들이었다.


나는 오늘도 그 사람들을 잊지 못한다. 그들은 밤마다 꿈속에까지 나타나 고함을 치며 통곡한다. 그럴 때면 나도 소리를 질러대는 것 같다. 정신을 차려보면 아들이 나를 깨우고는 이마의 식은땀을 닦아주고 있다.


교화소의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참상을 북한인민들도 잘 모르고 있다. 그저 막연히, 감옥에 가면 고생한다는 식으로만 알고 있는 것이다.

<정상적 두뇌가진 사람이면 나의 증언 이해하기 힘들지도>

교화소에 근무하는 안전원들도 비밀을 지키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같은 안전원이라고 해도 자기 교화소에서 근무하는 안전원들 외에는 교화소 정문 안에 들어갈 수 없으며, 비밀을 누설하면 그들도 목이 달아나고 죄인으로 잡혀 들어 가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두뇌를 가진 사람은 나의 증언을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다. 그러나 머지 않은 앞날에 통일이 되면 그들 공산주의자들, 입만 벌리면 ‘인민대중 중심의 사회주의’라고 외쳐대는 사회주의 낙원의 깊숙한 곳에 웅크리고 있는 ‘구천지옥’이 온 세상의 역사 앞에 공개될 것이다.

<7년 만에 밟는 바깥 세상>

감옥에서 나온 나의 마음은 줄곧 집으로 달렸다.
언제 다시 살아 바깥 세상을 볼 수 있을까.
교화소에 잡혀온 첫날 작업장 창 너머로 멀리 보이던 산봉우리를 바라보며 앞이 캄캄하고 심장이 당장 멈출 것 같은 충격을 간신히 이겨내고 죄수 생활을 시작한지 7년만에 기적적으로 석방된 것이다.
우리  집은 산간오지로 추방되었다. 평양에 있던 아들도 추방되어 강제노동을 하고 있단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살던 집도, 재산도 다 빼앗기고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공부만 하고 일이라고는 한번도 해보지 못한 아들이 오지에서 강제노동을 하다니...
나를 안심시키느라 무작정 괜찮다고 웃음을 지어보이는 아들이 안쓰럽기만 했다. 착잡한 생각으로 북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그때는 1월이라 북방의 겨울 추위에 대지는 꽁꽁 얼어 붙었다.


7년만에 처음 타보는 기차였다. 간신히 자리를 잡고 앉기는 하였으나 열차 안은 사람들이 가운데 복도까지 들어앉아 움직일 수가 없을 정도이다. 여행객들의 얼굴에 서린 생활고에 지친 표정들과 짐보따리를 보니 지금 나라사정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열차 선반에 쌓여있는 짐짝들은 하나 같이 식량자루였다.

<얼마나 더 고통을 감수해야 밥이나 먹고 살 수 있는지>

열차 창문에 유리가 없는 칸이 많았다. 달리는 속도에 차창으로 찬바람과 눈가루가 날려 앉아있는 사람들이나 서있는 사람들이나 추위에 떨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라가 점점 왜 꼴이 이렇게 되어 가는지, 얼마를 더 견디고 고통을 감수해야 제대로 밥이나 먹고 살 수 있겠는지 참으로 안타까웠다.


거의 30시간만에 드디어 내가 살아야 되는 고장에 내렸다. 벌판은 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자유스러운 몸이 되었다고 기뻐하던 것도 잠시, 나는 다시 추방지로 들어가야만 되었다.


한번 낙인찍히면 그 사회에서 영원히 매장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석방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고문의 후유증이 나타났다. 가슴까지 늑막에 물이 차 올랐다.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숨이 차 오르고 줄 기침이 터지면서 당장 숨이 넘어가는 것 같았다.
아들에게는 부담이 더 컸을 것이다. 그러나 한 번도 힘들다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 낮에는 힘든 노동에 시달리고 밤이면 나를 간호하느라 밤잠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매일 밤 고열에 신음하는 엄마에게 약을 먹이지 못하는 아들의 심정이야 오죽할까 싶어 나는 늘 괜찮다고 억지로 웃어 보이기도 하였다.

<아들이 가져온 산비둘기 가슴에 대니 부기 가셔>

우리가 이 소굴을 벗어나려고 하여도 우선 내 몸이 빨리 회복이 되어야 한다. 아들과 자유세상으로 가려면 내가 일어나야 한다. 무조건 살아서 도망쳐야 한다. 내가 만약 이대로 여기에서 죽는다면 아들은 영원히 이 지옥에 매장될 것이다. 모진 마음을 먹고 이를 악물고 병을 이기려고 애썼다. 병마와 사투를 벌이던 어느날 저녁 아들은 산비둘기를 잡아 가지고 왔다.


“어머니 이것을 가슴부위에 붙이면 물이 흡수된다고 누가 알려주었습니다.”
산비둘기를 잡아 창자만 걷어내고 그대로 물이 차 부어오른 가슴에 붙여주었다. 붙이고 잠시 시간이 지나니 정말 신기할 정도로 가슴에서 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하였다. 걸레조각을 허리에 둘렀지만 물은 방바닥에 떨어질 정도로 계속 흘러내렸다. 흘러내리는 물에서는 송장 썩은 냄새가 났다.


밤새워  붙이고 있으니 새벽녘에는 부어있던 가슴부위가 육안으로 보아도 퍽 가라앉았다. 계속되던 고열이 차츰 내리기 시작하였다. 오랜만에 편하게 누워 잘 수 있었다. 숨이 차 제대로 눕지를 못하고 벽에 기대어 앉아있어야 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산비둘기 3마리를 잡아 연속 며칠동안 붙이고 나니 그런대로 밖의 변소에 갈 정도로 나아졌다. 기적 같은 일이다. 내 몸은 빠르게 회복되었다.

<꺼져가던 생명 이어지기까지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

차디찬 감옥의 콘크리트 위에서 겨울을 나면서 동상을 입었던 발이 또 말썽을 피웠다. 벌겋게 부어나고 발가락에서 진물이 흘렀다. 발가락이 시커멓게 죽어 들어가고 그대로 두면 발을 잘라야 할 정도로 위험하였다. 어디에서 약을 구할 수가 없었다.


아들은 겨울추위에 바짝 말라버린 가지나무를 한 아름 베어왔다. 그것을 솥에 넣고 물을 넉넉하게 부어 끓여댔다. 가지나무를 삶아낸 물을 식혀 거기에 발을 담그고 있으라고 하였다.


며칠 동안 가지나무를 우려낸 물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통증이 심하던 것이 차츰 멎고 붓기가 빠졌다. 아들의 지극정성으로 다시 발이 나아 땅을 디딜 수가 있었다. 꺼져가던 한 인간의 생명이 이어지기까지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이 이미 있었다고 믿고 싶다.
겨울이 가고 얼어붙었던 대지가 녹기 시작하였다.

<탈출을 위한 준비>


그 해 여름을 이겨내야 하며 나는 더 빨리 몸을 추세워야 했다. 여름철에는 강물이 불어 국경을 넘을 수 없다. 강이 얼어붙기를 기다리자면 여름을 무사히 지내면서 준비해야 했다.


아들은 항상 밝은 얼굴로 나를 위로해 주었다. 억울한 마음에 이렇게 만들어 놓은 김정일을 욕하면 차분하게 나의 마음을 진정시켜준다.


“어머니. 욕한다고 김정일이 듣는 것도 아닌데 괜히 어머니만 힘들어요. 진정하시고 새 세상으로 가서 다시 시작하겠다는 생각만 하세요.”

<고기를 못 먹다가 토끼 키워 새끼 쳐서 며칠에 한 번씩 먹어>

이렇게 우리 모자는 서로를 위로하면서 탈출을 준비했다.
아들은 몇 년을 가슴 속에 한을 품고 묵묵히 성실하게 일을 잘 하였다. 덕분에 지금은 안전원들이나 간부들이 오히려 접근하여 이것저것 수리를 해달라고 하기에 그래도 힘들게는 일하지 않는다고 나를 안심시키기도 하였다. 아들은 전자공학을 전공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써먹는 때가 있었다. 안전원들과 간부들의 집에 있는 텔레비젼을 고쳐주고 농장기계를 수리하기도 했다.


어느 날에는 주머니에 새끼토끼 2마리를 가지고 왔다. 토끼는 빨리 자리기 때문에 6개월이면 새끼를 낳는다.


우리집 뒤에 있는 밭에는 씀바귀가 많았다. 토끼는 하루가 다르게 빨리도 컸다. 예전에 키워본 경험이 없다보니 두 마리가 암수 한 쌍인줄을 몰랐다. 언제 자기들끼리 새끼를 배었던지 새끼를 12마리나 낳았다. 토끼사료는 집 뒤 밭에 나가면 씀바귀가 많으니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고기를 먹을 기회가 거의 없는 조건에서 우리는 토끼를 키워  고기를 먹을 수가 있었다. 그 해 여름 우리 모자는 며칠에 한번씩 토끼고기를 먹을 수가 있었다.


번식이 빠른 토끼는 연이어 매달 새끼를 낳았다. 우리 집 마당에는 토끼가 무리를 지어 있었다. 아들의 혀약한 몸도 고기를 매일 먹으니 기운을 차렸다. 나도 마찬가지로 회복이 빨랐다.

<7년 옥살이 후 잊지 못할 밑바닥 생활... 하나님께 감사>

그런 대로 어디라도 달려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우리 집 마당을 지나칠 때마다 안전원들이 토끼구경을 하였다. 자기네 토끼는 여름장마가 시작되니 병이 나 몰살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냥 마당에 방치해 놓아도 병은커녕 잘 자라기만 하였다.


감옥에서 나와 한 해를 추방지 농장에서 보낸 시간은 참으로 내 인생에서 잊지 못할 북한의 밑바닥 생활을 체험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나는 하나님께 늘 감사하게 생각한다.


한때는 북한의 상류사회에서 부러운 것 없이 당의 신임을 받으면서 사회적 지위를 가지기도 하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영문도 모르게 당 정책을 제대로 집행하지 못하여 인민생활에 지장을 주었다는 명분으로 7년이라는 긴 세월을 옥살이를 하게 되었고, 나 한 사람 때문에 우리 가정은 산골 추방지로 쫓겨나는 비극을 맞게 되었다.


세상살이를 이것저것 체험해 보면서 어머니가 생존해 계실때 늘 하시던 말씀이 기억났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인간은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을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 나는 어떻게 하면 이 억울함을 밝힐 수 있을까 고심도 많이 하였다. 해명되면 다시 예전처럼 생활할 수가 있을 텐데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마지막 결론은 어머니의 말씀대로 인간에게서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
하늘의 순리는 우리 모자가 하루라도 빨리 북한 땅을 떠나도록 만들었다.                                  

출처 : 한국논단

 

 

 

 

등록일 : 2008-04-13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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