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덕수용소를 향한 나의 여정은 1999년 11월 10일 중국에서 만난 한국 사람의 안내로 나를 포함한 7명의 탈북자가 러시아 국경을 넘다가 러시아 국경수비대에게 잡히면서 시작된다. 러시아 당국은 우리를 중국으로 넘기려고 했으나, 탈북자 문제로 골치를 앓았던 탓인지, 중국 측에서는 우리를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유엔으로부터 난민인정을 받고 한국행을 약속 받았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우리는 강제적으로 북한 대사를 면담하게 되었다. 면담이 이루어지기 전에 러시아 당국은 우리에게 북한 대사를 만나겠느냐고 물어왔다. 우리는 만나지 않겠다고 단호히 거절을 하였고, 심지어 ‘북한 대사를 만나게 되면 우리는 북한에 다시 가게 될 것이기 때문에 만날 수 없다’는 내용의 공동성명까지 써서 러시아 측에 전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면담이 이루어진 자리에서 북한 대사는 우리가 북한에 다시 돌아가게 될 것이며, 죄에 따라서 용서를 해 줄 수도 있다는 말을 했다.
당시 러시아는 우리가 중국을 통해 넘어왔으니 중국으로 되돌려 보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중국은 러시아가 직접 북한으로 넘기라는 입장이었는데 결국 우리는 1999년 12월 30일 중국으로 송환되었고 조사를 받기 위해 호송되던 중 기회를 틈타 탈출했지만 나를 제외한 6명은 탈출시도 3~4시간 만에 모두 붙잡혔다.
다행히도 나는 연길까지 도망을 쳤지만, 빠르게 좁혀오는 추적망이 무서워 중국에서 잡히는 것보다는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있듯이, 차라리 북한에 숨어있으면 안전할 것이라고 판단해 북한으로 갔다.
구류장에서 요덕으로
2000년 1월 13일 나는 북한으로 돌아왔지만 차마 집에는 가지 못하고 친구 집에 숨어있었다. 3일 정도 숨어있다 다시 중국으로 넘어가기 위해 친구 집을 나섰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거란 생각으로 마지막으로 집에 들르고 싶어 갔는데 집 근처에 잠복해 있던 안전원들에게 잡히고 말았다.
개머리판으로, 발길질로 머리고 얼굴이고 몸이고 할 것 없이 엄청난 구타를 당했다. 그리고는 손을 꽁꽁 묶인 채 마치 개처럼 구류장으로 끌려갔다. 당시 내 나이 18세였다. 구류장에서 조사를 받는 동안 나는 인간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고문과 기합을 당했다.
뜨거운 방열판 위에 무릎을 꿇어앉는 고문 끝에 남은 선명한 화상자국을 보면 그 날의 기억이 다시 떠오른다. 먹을 것도 제대로 먹지 못했을 뿐 아니라 집에서 들어온 사식도 빼앗겼다. 내가 조사에 적극적으로 응하지 않으니 나를 무릎 꿇여 놓고 내가 보는 앞에서 다른 수감자에게 내 사식을 먹게 만들곤 했다. 일종의 심리적인 고문이었다. 그러면서도 나에게 들어온 사식을 배고파하는 다른 수감자에게 줬다는 이유로 30분 넘게 변기에 머리를 박으라고 명령하기도 했다.
나는 구류장에서의 모진 조사 과정을 거치고 6월 말에 요덕으로 이송되었는데 꼭 죽으러 가는 줄로만 알았다. 새벽 3시쯤 나와 안철수라는 다른 죄수를 깨워 좋은 음식을 먹이기에, ‘아! 나는 이제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밥을 먹고 나니 우리의 손발을 묶고는 어딘가로 데려갔는데 도착한 곳이 요덕수용소 혁명화구역인 서림천 이었다.
서림천에서의 생활
서림천에 도착했을 당시에는 내가 몇 년 형을 받고 온 것인지도 몰랐지만, 집에서 붙여준 옷이랑 가재도구가 있었기 때문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용소에 처음 들어가면 외래자반에 배치된다. 구류장에서 다들 몸이 너무 많이 상해서 오기 때문에 몸을 회복시키기 위해 외래자반에 열흘에서 한 달가량을 머물게 한다. 그렇다고 해서 노동을 안 하는 것은 아니고, 다만 노동의 강도가 일반적인 수용소의 작업강도보다 조금 약할 뿐이다.
당시 나는 수감자들 중에서 가장 어렸다. 어린 애들이 수감되면 보위부원들도 긴장을 한다. 젊은 혈기에 도망치거나 사고를 칠까 걱정을 하여 어린 수감자들에게는 잘 대해주는 편이다. 외래자반에 6개월 동안 머무를 수 있었던 것도 내가 어렸기 때문이다. 6개월 뒤 나는 건설소대에 배치되어 2003년 7월에 해제될 때까지 건설소대에서 일을 했다.
나는 건설소대에서 벌목, 제재, 미장, 관 짜는 일, 시체매장, 건설 등의 일을 했다. 서림천에 하나 있던 트랙터를 운전하는 일도 건설소대의 몫이었다. 벌목의 경우 하루 계획량은 보통 나무 11~12대를 벌목해야 한다. 4시쯤에는 새참을 주는데 소대장이 돌아다니면서 작업량을 확인하고 많이 한 사람에게는 새참을 더 줬다.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빨리 계획량을 달성했기 때문에 많은 새참을 먹을 수 있었다.
수용소에서의 한 끼 식사는 일인당 120g이었다. 워낙 적게 먹고 많이 일을 하다 보니 영양실조로 죽는 사람들이 많았다. 내가 있는 3년 동안 100명이 넘게 죽었는데, 그 중 한 명은 일을 하다가 사고사 하였고 2명은 공개총살 당했다. 구류장에 보름 동안 구류되어 있다가 와서 죽는 사람도 몇 명 있었다. 구류장에서는 한 끼에 30g을 주기 때문에 구류장에 다녀오면 더욱 살아남는 것이 힘들다.
수용소는 경비와 감시가 삼엄한 곳이다. 노동과 굶주림으로 교화를 시키는 곳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감옥과 같은 곳이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한 시간에 한 번씩 소대별로 인원체크를 하였다. 잘 때도 수용소경비가 한 시간에 한 번씩 인원을 확인하였다. 밤에 자다가 화장실을 가려고 해도 반드시 수용소경비에게 보고를 해야 했다. 수용소경비는 수감자 중에서 선별해서 섰다.
수용소에서는 기본 3인이 1조가 되어 움직였는데 화목공이나 중대 식모와 같이 개별 행동을 해야 하는 사람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이동 할 수 있었다.
서림천 지역은 본래 일반지역이었으나 완전통제구역 사람들을 동원하여 그 지역에 수용소를 건설하고 1999년부터 혁명화 대상자들을 수감하기 시작했다. 내가 수용소에 있을 당시 다른 지역에서 쓰던 물건들이 공급된 적이 있는데 10년도 더 된 고추장, 곰팡이가 핀 입쌀 등 혁명화구역에서는 볼 수도 없는 물건들이 들어왔다.
다시 만난 7인방
요덕수용소 혁명화구역에서 북송 당시 미성년자였던 김승일을 제외한 러시아 사건 관련자 5명을 모두 만났다. 내가 제일 먼저 수용소에 수감되었는데 김광호, 이동명, 장호영, 방영실, 허영일이 차례로 들어왔다. 그러나 5명 중 가장 먼저 들어온 김광호는 외래자반에 들어온 지 이틀 만에 다른 구역으로 재이송 되었는데 어디로 갔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이동명과 장호영은 평양에서 조사를 받고 함께 들어왔다. 두 사람은 나와 함께 건설소대에 배치되었다. 부부였던 방영실과 허영일이 6명 중 가장 늦게 들어왔는데, 방영실은 농산소대에 허영일은 남새소대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방영실은 7개월 만에 사망하였다.
방영실의 죽음
7인방 중 유일한 부부였던 방영실과 허영일의 사랑은 정말 눈물겨울 정도였다. 방영실은 삶의 의욕을 상실해서 죽었다. 난민인정까지 받았는데 북송 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나니 몸도 마음도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버린 것이다. 수용소에 수감된 뒤 방영실은 밥 먹기를 거부했다. 똥오줌을 못 가릴 정도가 되었는데도 노동에 대한 의무로부터 자유로워질 수는 없었기에 아픈 방영실은 일터로 끌려 나갔다.
일을 못해도 밭에 끌려 나가 멍하니 앉아 있다가 들어오곤 했다. 일을 하지 않으니 배급도 계속 줄어들었다. 남편인 허영일은 그런 방영실을 지극정성으로 돌봤다. 그는 하루 일과가 끝나면 여자숙소로 달려가 아내를 씻겨주고 자신의 음식을 나눠주곤 했다.
두 사람의 모습은 눈물 없이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수감자들은 어지간한 정성과 사랑이 아니고는 못할 짓이라면서 두 사람을 지켜보곤 했고 보위부원들도 사람인지라 두 사람을 안타깝게 지켜보았다.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가 된 방영실은 죽기 보름 전에 병원에 입원하였는데 허영일은 끝까지 아내를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의 하루 일과를 모두 소화하면서도 매일 병원에 가서 아내의 기저귀를 갈아주고 아내를 살리기 위해 끝까지 고군분투하였다. 병원이라고 해봐야 약도 의료도구도 없었다. 더군다나 사회에서 수의사를 하던 사람이 의사라고 근무했으니 해줄 수 있는 처방이라고는 죽을 쑤어주는 것이 전부였다. 죽음이 기정사실화된 사람만이 입원하는 그런 곳에서 방영실이 보름이나마 더 살 수 있었던 것은 남편의 눈물 나는 간호 덕이었을 것이다. 방영실이 죽던 날의 모습은 20kg도 채 안되는 너무 마른 모습이었다.
수용소의 죄인에겐 사랑도 사치
수용소 내에서는 남녀 간의 연애가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지만 감시의 눈길을 피해 몰래 연애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나도 그중 하나였다. 외래자반에 들어가 식당일을 하면서 만난 3살 연상의 함순정이라는 여자와 나는 그녀가 해제되어 나갈 때까지 몰래 사귀었다.
당시에 연구실 관리원으로 있던 덕구라는 영감이 하나 있었는데 50 이 넘은 그는 재일교포 출신으로 무역에 종사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돈이 많았다. 어느 날 그 영감이 순정이를 꼬여서 둘이 몰래 만나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용소는 사회에서 고급간부였거나 돈이 많으면 다른 수감자에 비해 혜택이 있었다. 물물교환을 할 만한 것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든 목숨을 부지해서 살아나가는 것이 수감자들의 유일한 목적이기 때문에 수용소 내에서는 살기 위해 소대장이나 중대장 혹은 돈이 많은 사람에게 일부러 접근을 하는 여자들도 적지 않았다.
이 영감은 돈이 많았을 뿐 아니라 연구실이라는 독립된 공간에서 생활을 했기 때문에 생활이 좀 나은 편이었다. 게다가 과수원도 관리를 했기 때문에 때때로 사과를 얻기도 했다. 수용소 내에서는 구경도 하기 힘든 사과를 줄 수 있는 덕구와 기껏해야 옥수수 몇 알을 줄 수 있는 나는 애초부터 비교대상도 될 수 없는 것이었다. 수용소의 죄인들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은 사치일 뿐인 것이다.
수용소에서 만난 사람들
내가 있는 동안 두 번의 공개처형이 있었다. 40대였던 최광호는 졸다가 대열에서 이탈하였는데, 처벌을 받는 것이 두려워서 도망쳤다가 3일 만에 잡혀 처형당했다. 29세였던 김호석은 너무 배가 고파 감자를 훔쳐 먹다가 대열을 이탈한 게 발각되어 도망을 쳤다가 군견(軍犬)한테 물렸는지 옷은 다 찢기고 머리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상태로 잡혀왔다가 구류장에 끌려가 일주일 만에 공개 처형당했다.
숙소에서 떨어진 분주소 뒤 과수원에서 보위부원들이 키우던 양봉꿀을 훔친 사람도 있었는데 아무도 목격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만약 이 친구가 꿀을 밥과 바꿔먹으려는 시도만 하지 않았어도 완전범죄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는 배가 너무 고파 꿀을 밥과 바꿔먹으려고 시도하다가 들통이 나고 말았다.
처음에 보위부원들은 출입이 자유로운 수용소경비가 훔친 것이리라 의심했다. 철조망을 뛰어넘는 것도 불가능하지만 눈에 띄지 않고 다시 숙소로 들어오는 것도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꿀을 훔친 친구가 벌에 쏘이긴 했지만 여름이었기 때문에 단순한 식중독 증상이라고 생각하고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꿀을 훔친 지 보름 만에 붙잡힌 그는 구류장으로 끌려갔다. 보름 만에 돌아온 그는 그 다음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장명화라는 여자는 제대군인으로 무역일을 하다가 수감되었다. 당시 관리위원장이 정길현이라는 사람이었는데 삭주군 행정위원회 위원장을 하던 사람으로 김일성과도 몇 번 만났던 사람이었다. 장명화와 정길현이 부적절한 관계를 가지다가 발각이 되었는데 장명화만 처벌을 받았다. 정길현은 사회에서 고위직에 있던 사람이고 김일성과도 안면이 있었던 데다가 수용소 내에서 관리위원장을 했기 때문에 비록 수감자일지라도 끗발이 있었다.
그에 비하면 장명화는 그냥 여자 소대원일 뿐이었다. 정길현을 처벌하기가 부담스러웠던 보위부원들은 장명화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 씌웠다. 장명화 또한 구류장에 갔다가 보름 만에 돌아왔다. 보통 구류장에 갔다 오면 바로 죽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장명화는 보름까지는 버텼으나 구류장에서 받은 처벌의 후유증 부종으로 죽고 말았다.
심포에서 있었던 지하교회 사건으로 들어온 사람들도 있었다. 장현수·장강옥 내외, 엄영철 내외, 고은 이렇게 5명이 심포 지하교회 사건으로 서림천에 수감되었다. 이들은 성경 한 줄을 읽었다는 죄목으로 혁명화에 잡혀 들어왔다. 지하교회를 주도했던 다른 사람들은 죄질이 더 심하기 때문에 완전통제구역을 갔거나 사형에 처해졌을 거라고 했다.
철만이라는 친구도 있었다. 이 친구는 여자와 헤어지고 너무 상심한 나머지 술에 취해 도로 가로등을 부셨는데, 그것이 죄가 되어 혁명화에 들어온 친구였다. 한번은 이 친구가 사라져서 군인들까지 동원되고 비상이 걸린 일이 있었다. 철만이는 한참 만에 사물창고에서 발견되었는데 너무 배가 고파서 창고문을 뜯고 들어가 신입자들이 가져온 사탕을 훔쳐 먹고 있던 중 도주자로 간주되어 완전통제구역으로 끌려갔다.
지옥으로부터의 탈출... 그리고 간절한 바람
내가 요덕수용소에 수감된 죄목은 '조국반역죄'였다. 배가 고파 중국으로 건너간 것이 굶주림에 시달리는 가족을 살리기 위해 국경을 넘은 것이 정치범 수용소에 갈 정도의 죄인지 지금도 분노가 치민다.
원래대로라면 나는 '조국반역죄'로 이미 북한에서 사형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일명 '7인 탈북자 사건'이 UN과 국제사회의 관심을 받음에 따라 북한당국이 어쩔 수 없이 우리를 살려둘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된다.
지금 이 시간에도 수많은 무고한 국민들이 정치범 수용소에서 고통 받고 있다. 북한당국의 인권탄압과 통제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국민들을 하루빨리 구할 수 있도록 UN과 국제사회가 더욱더 노력해주길 간절히 부탁드린다.(Konas)
김은철 (요덕수용소, 2000~2003 수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