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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9월 26일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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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조의 역사는 바로 전교조의 정체이다
전교조 자료로 본 ‘전교조의 역사’는 스스로 반역단체임을 증명하는 셈이다.
김구현 

 

전교조의 역사는 바로 전교조의 정체이다. 전교조 자료에는 활동가를 교육시키는 내용이 있다. 전교조 전 서울시지부장 이었던 조희주는 활동가를 교육하면서 ‘전교조의 역사’에서 전교조의 출발점을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로 설명을 하였다.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약칭, 전평)’란 김일성·박헌영·모택동을 명예위원으로 삼고 1946년 ‘조선정판사 사건’으로 공산당이 불법화 되자 폭력투쟁을 전개한다. ‘대구폭동사건, 2.7폭동, 5.10총선 방해 책동, 제주 4.3폭동, 여순반란사건, 지리산 무장공비 저항’이 바로 이것이다. 민노총은 자랑스럽게 스스로 홈페이지에 ‘전평’의 실증적인 계승자라고 하였다. 민노총은 결론적으로 남조선노동당이며 현재는 김정일을 명예위원으로 모시는 것이다. 

전교조가 스스로 반역세력이었던 전평을 역사의 출발점으로 삼았다는 것은 스스로 반역세력이라고 증명하는 것이며 이러한 교육을 받은 전교조 조합원은 반역에 동조하는 세력이다. ‘반국가교육척결국민연합’에서는 “전교조는 왜 이적단체인가?”란 제목으로 전교조의 이적성에 대하여 이념적으로 토론회를 가졌으며 전교조는 토론회에 대하여 한마디 반론을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좌익에 점령 된 MBC, KBS는 이러한 사안에 대하여 한마디 말도 못하는 비겁하고 무능한 어영방송이며 북한을 소개할 때는 마치 북한을 미화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가 있다. 어찌 하였던 전교조 자료로 본 ‘전교조의 역사’는 스스로 반역단체임을 증명하는 셈이다.

아래는 전교조의 자료 중 일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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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기 서울지부 초등 조합원학교

2001. 11. 8 - 11. 29


일시

강의순서

주제

강사

내용

11.8

1

전교조의 역사

조희주

(전서울지부장)

전교조 운동사, 미래

2

전교조 문선활동

이난이

(지부선봉대장)

전교조노래, 운동가, 율동

11.15

3

조직활동론

이병우

(난곡중교사)

노동조합간부의 자세,조직활동

4

전교조 사업

김학한

(지부 정책실장)

정세 분석 및 전교조 역할

11.22

5

분회활동론

정애순

(초등북부사무국장)

분회활동을 어떻게?

6

참교육실천론

현원일

(지부참실위원장)

참교육을 어떻게

11.29

7

교사의 권리

윤종훈

(지부 교권국장)

교육법상의 우리의 권리

8

지도부와의 대화

김재석서울지부장

지부장과 함께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서울지부 초등위원회


해방 이후 노동조합 운동과 교원노조운동 


조 희 주(전 서울지부장)

Ⅰ.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

  - 민중과 노동자들이 공장의 주인이 되어 자주관리운동 전개, 인민위원회를 결성하여 자주적인 독립국가를 세우기 위해 투쟁.
- 그러나 45년 9월 상륙한 미군은 군정을 실시, 일제가 남긴 모든 재산 압수 관리함. 새로운 자본가를 양성하고 친일 경찰과 인사들을 등용하고, 민중들의 조직과 투쟁을 압살하기 시작함.
- 이에 선배 노동자들은 1945년 11월5일 최대의 노동조합 전국조직인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를 결성(전국 1,194개 노동조합에 조합원 약50만명이 소속). 그리고 미군정 철폐와 자주독립국가 건설, 물가상승과 생존권 악화를 해결하기 위해 조직적이고 대규모적인 투쟁을 전개.

① 46년 9월 총파업 - 철도노동자의 일급제 전환을 계기로 전국적인 공동투쟁 전개
② 10월 민중항쟁으로 확산(3백여 만 명이 참가)
③ 47년 3월 총파업 - 경찰민주화, 테러방지, 실업방지, 생활보장, 구속자석방 등 요구
④ 48년 2.7총파업 - 조국의 분단 위기라는 정세 앞에 유엔 감시단의 방한 반대
⑤ 48년 5.8 남한 단독선거 반대투쟁.
- 노동자들은 노동자 계급의 요구만이 아니라, 전 민족의 요구를 내걸고 전체 민중운동을 주도하고 투쟁의 선봉에 서는 역할을 함.

 
Ⅱ. 대한노총에서 한국노총으로 

 - 1953년에 최초로 노동법 만들어짐. 대한노총의 정치도구화, 어용화.
- 민중들은 60년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투쟁계기를 맞아 반독재 투쟁에 떨쳐나서 4.19 민주화운동을 벌였다. 임금인상과 어용노조 민주화, 대대적인 신규노조 결성투쟁 전개.
- 교원, 언론인, 금융 노동자들이 노동조합 결성,
- 어용 「대한노총」을 재편성하고 「전국노동조합협의회」와 통합하여 「한국노동조합총연맹」 결성.
- 1961년 5.16 군사쿠데타가 발생하면서 노동운동 대대적인 탄압.
- 박 정권은 임금을 동결하고 노동조합과 각종 사회단체를 해산.
- 정부는 「한국노총」을 어용으로 재편하고 노동관계법은 개악. 

▣ 4․19 교원노조 운동의 태동과 동향
- 1958년 후반기-대구 중심의 지방대학 교수들 교원노조 결성 추진(경영자의 독단적인 전횡방지를 위한 목적)
- 1959년 서울의 일부 사립대학 교수들이 중심이 되어 교원노조를 결성하고자 함.
- 이와 같은 움직임이 명백해지자 법무부와 보사부에서 노무자이외의 어떠한 일반공무원도 노동조합에 가입할 수 없다는 공문 발송
- 4․19를 계기로 교원노조 결성논의가 대구시내 중등학교 교사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됨.
- 1960년 4월 29일 교원 60명이 모여 교사들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향상과 교권의 확립을 위해 ‘대구시 교원노동조합 준비위원회’ 결성
- 1960년 5월 7일 대구시내 중고등학교 및 국민학교 교원노조 각각 결성

대구 중고등학교 노조 결의문
① 우리 노조는 대한교육연합회에서 탈퇴한다.
② 우리 노조는 대구시내 중고등학교 교육회에서 탈퇴한다.
③ 우리 노조는 교육위원회 구성 촉진을 기한다.
④ 우리 노조는 교육공무원법에 저촉되는 법규는 시정할 것을 정부와 국회에 건의한다.
⑤ 우리 노조는 전국노조협의회와 제휴한다.


대구 초등학교 교원노조 결의문
① 우리는 학원의 민주화를 위하여 교원노조를 조직하여 학원의 자유를 쟁취하는데 총궐기한다
② 우리는 교육에 만전을 기하기 위하여 교육자의 질적향상과 교육행정의 쇄신을 주장한다.
③ 우리는 교육자의 율령을 완수하기 위하여 교육자의 권익옹호와 사회적․경제적 지위보장을 주장한다.


- 1960년 5월 1일 서울의 47개 중고등학교 교사와 3개초등학교 교사 및 대학교수 등이 모여 서울 교원노조 결성 준비위원회 발족
- 5월 15일 부산 교원노조 결성(1,000여명의 중고등학교 교사 참여)
- 5월 22일 마침내 ‘한국교원노동조합연합회’ 결성(전국의 초중고 교사 및 대학교수 300여명참석)
- ‘한국교원노조연합회’ 결성이후에도 전국 각지에서 계속해서 교원노조 결성함.
- 5월 21일 부산초등교원노조 결성, 5월 24일 서울중등교원노조결성, 6월 29일 경북교원노조연합회 결성, 전국적으로 20여개 교원노조 탄생.
- 1961년 초에는 전국의 교원 약 10만명중 약 4만명이 교원노조에 가입함.
- 교원노조운동은 정부의 어용기관 노릇을 한 유일한 교직단체인 ‘대한교육연합회’에 대한 정면도전이었다. 대한교육연합회는 일제시대 식민지교육 통치기구였던 조선교육회를 재산, 이념, 사람까지 그대로 인계받고 있던 어용단체로서 1947년 11월 23일 오천석이 중심이 되어 발족된 교직단체였다. (이후 오천석은 민주당 정권의 문교부장관이 됨)
- 정부는 교원노조가 불법이라며 탄압을 계속함(벽지 좌천, 인사조치 등) 교원노조측에서는 행정소송제기, 궐기대회, 연좌데모, 가두시위 등으로 극한 투쟁을 전개함.
- 1960년 8월 23일 민주당 정권이 들어선 후 8월 25일 대구고등법원 특별부는 교원노조는 합법단체라고 판시하여 교원노조 법적승리 쟁취함.
- 그러나 장면정권은 다시 교원노조를 대한교련에 흡수하여 교원노조를 해체하려함.
- 오천석 문교부장관은 ‘교원은 노동자가 아니다.’ ‘노동조합이란 어감도 좇지 않다.’ ‘대한교련과 교원노조를 단일화하는데는 찬성한다.’고 정부측을 대변함.
- 교원노조측은 정부당국이 교원노조를 합법화하고 노조의 형식만 인정한다면 단체행동권은 자제하겠다는 양보의사 밝힘.
- 9월 26일 정부는 교직단체법안 추진, 교원노조는 교직단체법안 철회 투쟁 전개, 단식수업 및 연좌데모, 82명교사 졸도, 대구시내 중고생 14,000여명 궐기, 3,000여 중고생 농성돌입. 전국으로 확산(단식수업투쟁기간 동안 1,021명 졸도, 426명 중태) 마침내 9월 29일 교직단체법안 폐기
- 교원노조는 전국노동조합협의회와 국제자유교원노조연맹의 지원을 받기도 함. 국제자유교원노조연맹에서는 한국정부에 세계인권선언과 국제노동기구헌장에 위배된다는 것을 지적함.
- 이후 4․19교원노조는 5․16군사구테타에 의해 1,500여 교사가 구속, 해직당하면서 해체된 이후 70년대까지 교육현장은 기나긴 암흑기를 맞게됨.


Ⅲ. 70년대 노동운동 

- 박정권은 71년에는 「국가비상사태」를, 72년에는 「10월 유신」을 선포하고 「긴급조치」를 발표.
- 미조직 노동자들의 자연 발생적이며 폭발적 투쟁이 많았다.
70년 11월 13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며 분신항거한 전태일 선배의 투쟁은 고된 노동과 빈곤에 대한 인간선언이자, 인간으로서의 권리회복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이로 인해 노동문제가 사회에 널리 파급되었고, 노동자들은 스스로 각성하면서 자주적으로 살기 위한 투쟁이 전개되었다.
- 노총의 어용성과 정부 탄압을 뚫는 민주노조 건설과 어용노조 민주화 투쟁이 활발했다.
70년대에 약 2,500개의 새로운 노조가 결성됨. 70년 11월 청계피복노조, 73년 신진자동차(현 대우자동차), 원풍모방, 아세아자동차 노조 결성 등.
- 70년대 후반에 연대 지원 기구가 활성화됨. 카톨릭노동청년회, 산업선교회, 크리스찬 아카데미 등의 단체들이 노동자들의 의식, 조직, 투쟁사업을 지원 및 노동문제의 사회여론화.

* 대표적인 투쟁 - YH 무역 노조의 투쟁
79년 3월 YH무역 회장이 미국으로 자산을 빼돌려 놓고 회사를 폐업조치하자, 노조 측에서는 “공장폐쇄는 근로자들의 생존권을 박탈하는 비인도적인 처사이고 몇 사람만을 위한 사기극”이라면서 농성투쟁을 벌임. 정상화와 폐업을 반복하다가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79년 8월 신민당사에서 농성. 이에 정권은 문제해결을 위한 노력은 커녕 경찰을 난입시켜 강제연행. 이 과정에 김경숙씨가 시체로 발견. 정부는 연이어 노조지부장 등 간부와 종교인, 재야인사 등을 구속. 그러자 부산, 마산 지역의 민중들은 대대적인 항쟁에 돌입. YH 노동자 투쟁은 60년대 이후 한국 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 누적되어 온 사회적 모순이 첨예한 형태로 폭발한 투쟁이었고, 유신체제 붕괴의 도화선이 되었다.


▣ 70년대 말부터 교사운동 태동
- 1975년 국어교사였던 시인 양성우씨가 ‘겨울공화국’ 발표
- 양심적인 교사들 비공개 소모임 만들기 시작함. 소모임의 활성화가 80년대 교육민주화운동의 밑거름이 됨.
- 1975년 4월 12일 신일고 3학년 학생 700여명은 영락교회에서 예배를 본후 파고다공원에 집결하여 ‘유신헌법 철폐’를 외치며 동아일보앞까지 시위행진을 함.(9명제적, 150여명 징계, 학생회폐지하고 학도호국단 부활됨)
- 1975년 5월 13일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한 박정희정권은 전국 고교 및 대학에 학도호국단을 조직하여 군사교육체제를 강화하라고 지시. 두달 후에는 교육관계법령을 개정 ‘교수재임용제’ 신설하고 국립대교수 신규 채용이 계약제로 바뀜.
- 1976년 2월 28일 문교부는 교수재임용제를 단행하여 전국 98개 대학에서 416명의 교수 해임함.
- 1978년 6월 27일 대학교수들이 ‘우리의 교육지표’ 발표(성내운 교수, 송기숙 교수 등) 성내운 교수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1979년 1월 체포되어 구속됨.
- 70년대말 유신독재에 맞서 투쟁하기 위해 일부 교사가 반독재 투쟁의 비공개조직인 ‘남조선 민족해방전선’(남민전)의 산하단체인 <한국민주투쟁 국민연맹>에 가입하여 ‘민주구국교원연맹’ 결성을 구상하였으나 79년 10월 남민전사건의 발생과 함께 관련교사들이 구속됨.

Ⅳ. 80년 ~ 87년 이전
1. 80년 봄, 노동운동 암흑기 (80~82년)
- 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암살당한 후 80년 봄에 학생․시민들의 유신잔재 세력의 퇴진과 계엄해제를 요구하는 시위 격화.
- 5.17 쿠데타 전두환 권력 장악 5월 광주민중항쟁을 압살, 노동운동, 민족민주운동 폭압적 탄압.
- 노동법을 개악, 『산별노조 체계에서 기업별 노조체계로, 노조설립요건의 강화, 방위산업체국공영 기업에서의 쟁의금지, 3자개입금지』등.
- 「비상계엄하 노조활동지침」 등 7가지의 정화지침 마련, 노조임원 사퇴강요, 전임자 삭감, 정화대상자 선정과 사직강요, 노조간부 191명을 ‘강제 정화조치’, 50여명의 노조간부 삼청교육대 보냄.
- 전두환 정권은 70년대부터 활성화된 민주노조를 물리적으로 해체, 5.17 이전에 112만명이던 조합원이 80년말에는 95만명으로 격감, 청계피복, 원풍모방 노동조합의 격렬한 투쟁은 계속됨. 

2. 역량축적과 방향의 모색기 (83~87년까지)

1) 5공 치하의 사회적 상황
- 외국자본의 급격한 도입 등 독점 자본을 위한‘민간 주도 경제정책’실시. 예속화 독점화됨.
- 81년부터 미문화원 방화점거투쟁, 광주학살 원흉처단 요구 투쟁 등 대학생들의 시위 지속, 농민들은 외국농축산물의 도입 반대, 농가부채 해소, 농협민주화투쟁, 빈민들은 철거반대투쟁 전개.

2) 도약을 위한 준비
(1) 83년 12월 5공 정권이 소위 ‘유화조치’를 실시, 대중투쟁 고조.
84년 4월 명동성당에서 청계피복노조 복구 및 합법성 쟁취투쟁. 84년 5월 대구, 부산 등 택시 노동자들의 파업, 84년 여름부터 85년 4월까지 대우자동차 어용노조 민주화 투쟁 전개.
(2) 이때부터 70년대와는 달리 남성, 대공장 기간산업 노동자가 운동의 전면에 등장. 서울, 인천 등 민주노조가 속속 결성됨. 84년 초에서 9월까지 157개 노조가 결성.
(3) 구로동맹파업
- 85년 6월 서울 구로지역 9개 노조가 전설적인 7일간 동맹파업 전개.
이 투쟁에서 노동자들은 “구속자 석방, 노동악법 철폐, 해고자 복직, 최저생계비 보장, 민주노조 파괴에 앞장서온 노동부장관 물러날 것, 폭력경찰 물러가라! 구로지역 20만 노동자여! 다함께 일어나 싸워나가자!”고 외침. 43명이 구속, 2천명이 해고됨.
- 이 투쟁은 내용이나 규모면에서 실로 충격적이었음. 노동자계급과 반독재 민주화운동으로 노동운동의 정치적 과제가 부각됨. ‘우리 노조만 잘 지키면 된다’는 조합주의, 기업별 의식을 극복하고 노동자의 계급적 단결을 이룰 수 있는 계기 마련. 노동운동의 방향 제시의 전환점.
- 기업별 활동이 아니라, 연대활동과 투쟁을 끊임없이 시도.. 87년 이후 노동운동의 밑거름.

▣ 80년대 초반부터 87년 전국교사협의회 결성 이전까지의 교육운동
- 81년 아람회 사건. 7월 19일 교사 6명 등 11명 연행 한달간 조사함. ‘민중교육청년협의회’ 라는 모임을 구성한 정도인데 좌경용공단체로 왜곡조작함.
- 82년 12월 8일 전북도경은 고교교사 9명이 ‘오송회’라는 용공이적단체를 구성하였다고 발표함. 11월 2일불법연행당한 교사는 한달간 모진고문 끝에 ‘4월 19일 5명의 교사가 소나무밑에서 술을 마셨다’고 하여 경찰이 오송회라 붙임. 제도교육의 모순에 고민하여 술좌석에서 고민과 갈등을 이야기한 것이 이적단체로 돌변함.
- 80년대 교사운동은 광주항쟁의 좌절을 극복하고 사회 제부문에서 민족민주운동이 다시 일어나는 전체적인 흐름속에서 자생적인 소모임을 형성하며 태동함(70년대말 비공개 소모임이 토대)
- 80년대 초 교육운등의 전교협결성전까지 크게 두가지 흐름으로 전개됨.
- 하나는 종교단체 산하에 공개조직을 결성하여 교사대중에 대한 교육,선전,집회 등을 통하여 공개대중운동의 기초를 닦았고, 또 하나는 학교단위나 지역단위에서 비공개 소모임을 형성하여 학교현장의 구체적인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면서 대중적 지반을 넓혀 나감.
- 81년 8월 전국의 31명의 교사들이 구성
- 82년 1월 5~7일 서울 다락원에서 ‘한국 YMCA중등교육자협의회’ 창립함. 같은 해 서울과 광주에서 지방 Y교사회가 창립된 후 전국 20여개 도시에 창립. 각 지역의 독자적인 운영과 전국연수회, 총회 등을 통해 교사운동을 소모임 수준에서 전국적인 통일성을 갖는 운동으로의 단초를 마련함.
- ‘한국 YMCA중등교육자협의회’는 한국교원노조연합회가 5․16군사구테타에 의해 무참히 깨진 이후 최초로 등장한 자주적인 교육운동 단체라는 데 큰 의의가 있음.
- 83년 12월 ‘교과서 분석’ 사건 : 통일문제가 교과서에서 어떻게 다루어졌는가에 대한 공동연구작업이 정권에 의해 탄압 받음. 이후 통일문제를 여론화시킨 의의가 있었음. 

◉ YMCA 초등교육자협의회 창립
- 대부분 지역 Y교협에 초,중등이 포괄되어 있었으나 회원이 많은 서울과 부산은 Y초등교협을 따로 결성하여 활동함.(서울은 1983. 12. 15 창립, 부산은 1985. 7. 20 창립됨)
- 1985. 8. 17~19 의정부 다락원에서 <제1회 전국초등교육자협의회>를 개최하여 ‘초등 교사의 나아갈 길’에 대해 논의하였고 조직확대를 꾀함.
- 1986. 8. 17~19 <제2회 전국초등교육자협의회>를 개최하여 전국조직건설에 대해 논의하였으나 당시 ‘교육민주화선언’ 이후의 탄압국면 때문에 의견이 모아지지 않음.
- ‘서울 YMCA초등교육자 협의회는 84년 2월 1일부터 87년 6월까지 매월 회보 발행(500~1000부)
◉ 기타 여교사들이 중심이 된 가 83년 6월 창립하여 87년 9월까지 활동하였고, 84년 1월에 창립된 <흥사단 교육문화연구회>는 서울교사협의회가 창립될때까지 활동함. 

◉ <민중교육> 지 사건
- 1985년 5월 <교육현장>과 <민중교육> 두권의 무크지 발행. <교육현장>은 ‘교사와 학생의 참 삶을 찾아서’라는 부제하에 교육현장의 문제점을 진솔하게 파헤침. <민중교육>은 ‘교육의 민주화를 위하여’라는 부제하에 교육문제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접근함.
-7월중순부터 <민중교육>에 기고하거나 간접적으로 관계를 맺은 교사들을 대대적으로 탄압
- 1986년 5월 10일 서울, 부산, 광주, 춘천의 교사들이 ‘교육민주화 선언’ 발표
- 1986년 5월 15일 <민주교육실천협의회> 창립.
- 1987년 6월 정치민주화 선언 (4․13호헌 철폐 주장).



Ⅴ. 87년 노동자 대투쟁과 ‘전국교사협의회’ 건설

1. 시대상황 : 6월 항쟁
- 87년 1월 박종철 학생이 고문 학살, 추모투쟁 전개, 4․13‘호헌조치’ 발표,‘체육관 선거’천명(한국노총 지지성명), 학생, 지식인, 종교인의 단식, 삭발 투쟁 전개.
- 6월 10일, 전국의 22개 도시에서 4. 19 혁명이후 가장 큰 규모로 ‘직선제 개헌, 군부독재 타도’를 요구하는 대중적인 가두시위 전개. 노동자민중의 광범한 참여로 투쟁 열기 고양됨.
- 직선제 인정 등의 ‘6.29 노태우 선언’을 발표. 기만적인 민주화 제스쳐로 위기를 극복하려고 했고, 당시 뚜렷한 투쟁 계획이 없던 민주화운동 세력은 투쟁을 지속시키지 못함, 6월 항쟁은 주춤하게 된다.

2. 7~9월 노동자 대투쟁
(1) 불붙는 노동자 대투쟁
- 6.29 선언으로 투쟁이 주춤하였지만, 노동자들은 6월 항쟁에서 보여진 민중의 힘에 대한 믿음과 군부독재 세력의 후퇴라는 조건과 80년대초에 다져진 역량을 발판으로 투쟁으로 진출함.
- 7~9월 투쟁의 최초의 진원지는 울산의 현대엔진 노동조합이었다. 회사측의 서류 탈취와 어용노조 결성에 맞선 현대엔진 노동자들의 투쟁은 현대자동차․현대중공업 등 현대그룹의 투쟁으로 확산되었고, 8월에는 현대그룹노조협의회를 결성. 8월 중순, 현대그룹 6개 사업장 4만 노동자들이 중장비로 무장한 대규모 가두시위와 행진으로 최루탄 난사로 대응하던 경찰을 무력화시킴.
- 7월 중순 부산, 마산, 창원 등에서 시작한 노동자들의 투쟁은 전국, 전산업으로 파급됨.
- 정부는 8월 말 대우조선 이석규 열사 민주국민장의 장례를 무력으로 해산, 본격적 탄압돌입.
- 9월 들어 언론의 이념공세, 파업 농성장 경찰력 투입 및 농성장 해산과 구속 등 대대적 탄압.

(2) 7~9월 노동자 대투쟁의 특징
- 하루의 쟁의건수가 몇 해 동안의 수보다 많은 자연 발생적인 투쟁의 폭발이었다. 6월 29일부터 9월 13일 까지 쟁의건수가 총 3,241건(하루 44)으로 80년 봄에 비하면 6배에 달하고, 이 중 제조업이 1,796건에 달한다. 그리고 전 산업, 전 지역에 걸쳐서 파업과 농성, 가두시위가 동시다발로 전개되었다. 6월 29일 이후, 노조가 1,162개 결성되어 그 전보다 노조 수가 40% 증가하였다.
- 투쟁의 내용과 요구는 민주노조 건설, 어용노조 민주화, 임금인상, 근로조건 개선으로 집약됨.
- 투쟁형태는 군부독재하의 노동악법을 노동자의 단결된 힘으로 돌파해 나갔다. 거의 모든 사업장에서 쟁의발생신고나 냉각기간을 무시하고 현장을 점거한 후 파업농성에 돌입했으며 가두시위와 행진이 일반화되었다.
- 지역․업종을 넘어 전국으로, 중화학 대기업 남성노동자가 중심이 되어 경공업, 중소기업, 여성노동자 사업장으로 확산되어 갔다. 특히 연구전문직노조, 언론노조, 병원노조, 사무금융노련 등 사무전문직 노동자의 노조결성으로 전산업에 걸쳐 노동조합이 탄생되기 시작하였다. 또 투쟁의 주체가 소수가 아니라, 다수의 대중투쟁으로 전개됨.

▣ 1987년 9월 27일 민주교육추진 ‘전국교사협의회’ 창립
  - 6월 항쟁 이후 교사운동의 급속한 진출은 이러한 민중세력의 진출과 흐름을 같이 하는 것이었으며 7월 14일 서울 홍제동 성당에서 1,500여명의 교사들이 모여 ‘교육민주화를 위한 서울지역교사 대토론회’를 열었음.
- 8월 13일 민주교육추진 전국교사협의회 준비위원회가 결성되고 9월 5일 전남교협창립을 시작으로 11월 22일 제주교협결성을 끝으로 전국14시도교협의 결성이 완료됨(이후 89년 1월1일 대전이 직할시로 승격됨에 따라 대전교협을 결성 15개시도교협이 됨)
- 시도교협 산하의 시군구교협도 9월 11일 강원도 홍천교협이 결성된 후 88년말까지 전국에 121개 시군구교협의 결성이 완료됨.
- 단위학교에도 89년초까지 700여개 학교에 평교사회가 결성되게 됨.
- 전교협의 주요활동은 교육법개정운동, 사학민주화투쟁, 교육실천활동의 경험교류 및 연구활동, 단위학교 민주화투쟁, 교사의 권익옹호 투쟁, 보충수업․자율학습 철폐투쟁

(3) 7~9월 대투쟁의 교훈
- 7~9월 투쟁은, 6월 민중의 폭발적 진출을 노동자의 대투쟁으로 상승 발전시키면서 6월 항쟁의 소강상태를 투쟁으로 극복하고 계승해 나갔으며, 십 년을 하루에 뛰어넘은 거대한 대중운동의 비약이었다. 이는 한국에서 노동자 계급이 형성된 이래 최대규모의 대중투쟁이었고, 노동자 투쟁의 분수령이었다. 이 투쟁을 통해 남한 노동조합운동은 비약적인 조직적 진출을 하였으며, 이후 지역, 전국, 업종별 노동자 단결의 기초가 되었다.

Ⅵ. 87년 이후 노조운동의 흐름 및 특징

1. 지역, 업종협의회 결성 : 87년 7~8월 대투쟁에서 89년까지
- 민주노조운동의 고양기
- 지역노조협의회, 업종노조협의회 결성기, 자주적 민주노조의 구심을 만들어 나가는 시기이다.
- 88년 지역, 업종별 연대만으로 극복이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노동자들은 ‘전국노동법개정본부’를 결성하게 됨. 전국노동자대회개최 ‘노동법개정, ‘독점재벌해체’를 요구.
- 88년 하반기에 전국회의를 결성 => 전국조직으로의 첫 발자국
- 89년 해방 이후 최초로 세계노동절100주년 기념 전국노동자대회를 투쟁을 통해 조직함.
이 시기의 성과는 노동조합수의 양적인 증가만이 아니라 88년부터 시작되는 임금인상투쟁은 곧바로 노동조합사수를 위한 투쟁으로 단결의 유지강화를 위한 투쟁으로 발전해갔다. 이는 개별의 노동자에서 지역, 업종의 틀을 넘어 계급적인 연대를 강화해 나갔으며 또한 방어적이고 즉자적인 수준이기는 하지만 투쟁의 정치적 성격 - 노동법 개정 투쟁, 공안합수부 폐지투쟁, 노태우 불신임 퇴진투쟁, 노동운동탄압분쇄투쟁 - 을 강화해 나갔다. 이러한 투쟁을 통해 15개의 지노협과 9개의 업종협이 조직되었다. 반 한국노총으로서의 자기 모습을 분명히 하였다.

▣ 88년 하반기 교육법개정투쟁
- 7월 3일 성균관대에서 전국의 약 2,500여명의 교사가 참여한 가운데 ‘민주교육법쟁취와 보충자율학습폐지를 위한 전국교사대회’를 개최하여 교육법개정투쟁을 전면화 시킴.
- 11월 20일 여의도에서 1만 5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민주교육법쟁취 전국교사대회 개최. 4․19교원노조 이후 가장 대규모적인 전국교사집회로서 교사대중의 투쟁이 가장 고양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 이와 같은 교사들의 투쟁에 힘입어, 여소야대인 상황에서 야 3당의 합의로 교원의 노동3권 보장이 국회를 통과하는 성과를 낳기도 했다. 또 교육자치제, 교장선출임기제, 교육이념, 학생의 권리 보장 등 일부가 뒤에 개선되기도 했다. 그러나 교원의 노동3권 보장은 노태우의 거부권 행사로 끝내 제도화되지 못했으며,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98년 2월 노사정 합의로 노동권 보장이 정기국회를 통해 이루어졌다.
- 80년대 후반 온 국민의 기대와 관심속에 결성된 전교조도 이러한 ‘교육법 투쟁’으로 단련된 교사들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1,500명의 해직과 10년간의 투쟁 또한 교육민주화를 열망하는 교사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 1989년 5월 28일 -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결성
- 교원노조 논의가 시작된 것은 88년 7월 전교협 제2차 임원 연수부터임.
- 이후 8월 13일 전교협 제1차 대의원대회에서 88년 하반기 주요 사업으로 교원의 노동3권 보장을 핵심으로 하는 교육악법철폐 투쟁이 결정됐고, 각 시도별 결의대회와 2차 대의원대회에서도 교원의 노동3권 쟁취 투쟁이 주요사업으로 전개됨. 이러한 투쟁이 모아져 88년 11월 여의도에서는 전국 1만 5천여명의 교사들이 참가하는 해방이후 최대 교사집회로 기록된 ‘민주교육법 쟁취 전국교사결의대회’가 개최됨.
- 88년의 이러한 노조결성 논의는 89년 1월 제5차 중앙위원회에서 노조결성이 의결되었고, 지도부는 2월 2일 연두 기자회견을 통해 89년 상반기중 교원노조 결성을 천명함. 이어 19일 서울 단국대에서 열린 제2차 대의원대회에서 상반기중 교원노조 건설, 노조건설을 위한 특별위원회 구성 등이 참석 대의원 280명의 만장일치로 의결되고, 3월 14일 교직원노조 건설특별위원회 발족식이 서울 여성백인회관에서 개최됨.
- 3월 9일 국회, 6급 이하 공무원노조 결성 및 단체교섭 인정하는 법 개정안 통과.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 5월 13일 교원노조 건설을 위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발기인 대회 및 준비위원회 결성대회가 문교부, 시도 교육위의 대회 참가자들에 대한 징계위협과 교장, 교감, 장학사를 동원한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전국 10개지역에서 발기인 1만 80000명 중 1만 5000명이 참가함.
- 89년 5월 28일 오후 1시 30분경 연세대 도서관 앞, 윤영규 위원장은 떨리는 목소리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결성 선언문을 낭독함. 결성식 10분, 플래카드 2장, 핸드마이크 하나, 교사,학생 등 200여명 참석함.
- 결성대회 전날 결성대회 예정 장소인 한양대는 철저히 원천봉쇄당함. 그럼에도 전야제에 참석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교내에 들어간 200여명의 교사들은 결성대회 준비함. 경찰의 침탈로 전원 연행당함.
- 한편 전국에서 올라온 교사 2,000여명은 건국대에 모여 오후 2시 30분 결성 보고 대회를 가졌으며 각 시도에서는 서울로 가는 기차역과 버스터미널 주위에 모여 원천봉쇄 항의 집회를 갖기도 함. 28일 확인된 발기인 수는 2만 3,000여명, 걷은 노조 기금은 2억 8,0000만원이었음.
- 전교조에 대해 정부의 탄압 시작됨. 좌경의식화 교육이라 매도함. 윤영규 위원장 등 5명의 지도부를 구속하고 각 시도 지부에 대한 수사를 본격적으로 진행하고 지부장 등을 구속시키기로 결정함. 특히 문교부는 가족, 친지, 장인, 장모, 교장, 교감, 장학사 등을 동원해 전교조 탈퇴 압력을 강화함. 이를 거부한 교사 1519명이 파면, 해임되고, 42명의 교사들이 구속됨.
- 7월 9일 여의도에서 ‘전교조 탄압저지 및 합법성쟁취를 위한 제1차 범국민대회 개최. 오후 1시 경희궁터에서 열린예정이었는데 경찰의 원천봉쇄를 피해 11시에 여의도 한강시민공원에서 교사, 시민 등 2,0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기습적으로 개최함. 대회시작 20분만에 경찰에 포위되어 2,000여명을 강제로 연행 서울시내 모든 경찰서에 분산 수용함.
- 7․9대회 이후 결사항전으로 농성과 단식수업 전개함 전국 5,000여명 단식수업. 탈진 200여명
- 조합원 명단공개 투쟁 전개함, 7월 16일까지 1만2,000명 명단공개
- 7월 25일부터 8월 5일까지 전국의 조합원 600명이 명동성당에 집결해 목숨을 건 단식농성을 전개. 이후 전교조는 정권의 ‘탈퇴각서강요’에 ‘탈퇴각서 무효화 선언’으로 맞서고, 2학기 개학과 더불어 해직 교사들의 출근투쟁과 현장방문 투쟁을 전개.
- 전교조 결성에 대한 국민적 반향은 정권의 의식화 매도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높았으며, 따라서 전교조를 지키려는 움직임이 범국민운동차원에서 진행됨.
- 6월 항쟁이후 최대의 민주세력들이 연합해 전국 2천여개 조직이 공대위에 참여했으며, ‘전교조 탄압저지 및 참교육실현을 위한 범국민서명운동’이 열흘만에 20만명을 상회하는 성과를 낳기도 했음. 또 전교조 탄압저지와 합법성쟁취를 위한 국민대회가 몇차례에 걸쳐 진행되기 함.
- 89년 전교조 결성은 교육민주화에 대한 중고등학생 운동의 폭발적 진출을 가져옴. 전교조 결성은 학부모들의 적극적인 활동을 불러 일으키는 계기가 되기도 함. 89년 9월 ‘참교육을 위한 전국학부모회’가 결성됨.- - 9월 24일 개최한 제2차 범국민대회는 전교조와 전체민주세력이 실제적으로 연대하여 강력한 공동투쟁을 전개한 일대 쾌거였음. 침체되었던 민주세력이 새로이 대중투쟁의 활로를 찾았으며 87년 이후 흩어져 있던 민민운동 진영을 하나로 모으는 계기가 됨.
- 전교조는 그해 11월 12일 노동운동의 주체 및 지지자를 확장시켰다는 이유로 전태일 노동상을 수상하기도 함. 그러나 많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대량해직과 지도부의 구속 등에 따른 신속한 대응을 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음. 

2. 전노협, 업종협의회의 탄생 : 지역과 업종을 중심으로 하는 조직의 탄생
- 90년 전노협, 업종회의 탄생 : 총노동과 총자본 진영의 경단협과 총노동진영의 대표인 전노협과의 투쟁이 시작됨.
- 90년 KBS, 현대중공업의 골리앗 투쟁, 전노협 총파업. 사무직, 대기업, 전노협 연대의 단초마련
- KBS노조의 방송민주화투쟁과정에서 업종회의 건설
- 90년 하반기 전노협과 업종회의 공동주최 전국노동자대회. 생산직 노동자와 사무전문직 노동자가 민주노조 총단결이라는 한방향으로 모아지는 계기가 됨. 

▣ 전교조 1990년 조직 복원 - 온 나라 걸으며 출발
① 온나라 걷기
- 참교육 실현과 전교조 합법성 쟁취를 온 나라에 알린다는 취지로 시작된 '온나라 걷기'는 전교조에게 막연한 기대와 불신감을 갖고 있던 국민들에게 전교조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과, 위상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
- 온나라 걷기 대회는 4월 1일 제주도 한라산을 등반하는 것으로 시작돼 5월 27일 서울 교사대회에 입성하기까지 15개 시․도, 107개 시․군을 경유하는 총 연장 거리 3800Km를 도보와 차량을 이용해 이동하는 행사였다. 온나라 걷기는 진행되는 과정에서 숱한 화제와 감동을 낳았다.

② 창립 1주년 전국 교사대회
전국 역․터미널 등에서 검문을 실시하는 등 정권의 끈질긴 방해와 교육관료들의 징계위협이 자행되는 가운데 경희대에서 치러진 창립 1주년 기념대회는 전국에서 교사 4,500여명, 학부모․학생 1500여명 등 6000여명이 참가하였다. 경찰이 행사장 안까지 최루탄을 난사하며 난입했으나, 교사들이 온몸으로 막아내었다.

③ 해직교사 원상복직 투쟁
5월 초 서울을 시작으로 진행된 원상회복 촉구서명은 서울에서만 8000여명의 교사들이 서명에 참여하는 등 전국적으로 확산돼 7월초 전국 3048개교에서 4만여명의 교사들이 서명에 참여했다. 7월 10일 국회에 해직교사의 원상복직과 보상에 관한 특별법 제정을 청원했다.

④ 국내외 연대 활동 강화
- 전교조는 국제교원들과의 연대활동을 위해 두 차례에 걸쳐 해외에 대표단을 파견하였다.
- 사립학교법 개악, 고교입시 부활, 임용고시 실시, 교육방송 장악에 맞서 교육주체 결의대회를 개최해 정권에 맞서 교육을 바로 세우고, 전교조를 지키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 아울러 전교조는 90년 1월 22일 출범한 전노협을 지키고, 농민․학생과의 연대를 강화하는 한편, 사무전문직 노동조합이 중심이 된 업종회의를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 전교조는 또 결성이후 처음으로 86년 교육민주화 선언일인 5월 10일 교사의 날을 제정했으며, 10일부터 16일까지 참교육주간을 선포하고, 참교사상을 제정하였다 

▣ 91년-교육자치 실현 투쟁
- 2월 26일 연세대에서 개최된 제6차 정기대의원대회에서 지방교육자치제 투쟁을 91년 상반기 최대 중점사업으로 의결하고, 교육자치의 핵심인 학교자치의 보장, 교사들의 단결권 보장과 해직교사 원상복직, 허구적인 교육자치제법 철회 등을 골자로 하는 ‘교육자치선언'을 참가자 356명의 이름으로 발표하였다.

① 87년 6월 항쟁 이후 첫 교사 시국 선언
4월 26일 학원 민주화 투쟁을 벌이던 명지대 강경대 군이 경찰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어 박승희(전남대), 김영균(영남대) 군 등이 분신 사망하고, 제주대 박병희 군 등 3명의 학생이 경찰에 쫒기다 난간에 밀려 떨어져 중상을 입는 등 사태가 더욱 악화되었다. 교사들은 제자들의 죽음이 계속 이어지고, 정권에 대한 전국민적인 분노가 거세게 일자 시국선언을 통한 사회민주화를 촉구하였다.

② 초등 교과전담제 투쟁
전교조 초등위원회는 ‘올바른 교과전담제 실시를 통한 수업시수 경감' 투쟁을 전개하기로 하고 2학기 들어 청원 서명을 시작하였다. 서명을 시작한지 불과 20여일만에 1만 5000천여명의 초등교사들이 참여한 것은 물론, 10월 6일 경희대에서는 최초의 초등 교사들만의 집회가 전국 1500여교사들이 모인 가운데 진행되었다.
투쟁결과 92년도부터 교과 전담제가 부분적으로 시행되는 성과를 낳았다.

▣ 92년 교육 대개혁 투쟁
- 전교조는 5월 8일 기자회견을 열어 교육대개혁을 위한 교육부, 교총, 전교조 등 3자 교육대개혁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제안하고 해직교사 원상복직과 교육대개혁을 위한 교사 서명을 돌입할 것임을 천명. 전교조가 추진한 서명은 서명 돌입 한달여 만에 5만명이 넘는 교사들이 참여했으며, 이같은 성과는 결성 3주년 교사대회로 이어져 교사대회는 결성이후 가장 많은 1만5천여명이 참석하기도 했다(경찰이 최초로 허용한 집회). 또 교육대개혁 투쟁은 5월 교사대회 이후 '교육대개혁과 해직교사 원상복직 추진위원회' 구성과 범국민 서명으로 이어졌다.

3. 93년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 결성 ~ 95년 민주노총건설을 위한 준비기
- 전노협, 업종, 그룹(대기업)의 연대 :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 구성(93.6.1)
- 민주노조의 조직 발전 모색, 준비하는 시기 : 민주노총, 산별조직 건설을 위한 노력 

▣ 93년 학교개혁 실천 위해 ‘복직’ 결단

① 복직 결단
- 4월 8일 오후 5시 정해숙 전교조 위원장과 오병문 교육부 장관은 교육부 장관실에서 결성 이후 첫 공식 면담을 갖고 해직교사 복직을 포함한 전교조 문제의 해결을 위해 최대한 노력할 것을 합의하였다.
- 6월 21일에는 오병문 교육부 장관이 국회 교육위 보고에서 ‘전교조를 탈퇴하면 94년 3월 선별해 복직시키겠다'고 발표해 원직복직을 요구하는 전교조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 7월 24일 교육부 장관은 해직교사 복직과 관련한 담화를 발표하고 8월 10일 ‘전교조 관련 해직교사 채용 추진계획'을 최종 확정.
- 전교조는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기 위해, 학교 현장으로 돌아가 합법화와 참교육 실천에 매진하기 위해 위원장의 고뇌에 찬 결단을 내렸다
- 10월 15일 정해숙 위원장은 기자회견을 갖고 눈물로 읽은 담화문에서 "교육부의 방침을 수용하거나 복직 문제를 종결하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학교 현장으로 돌아가 동료교사, 학생, 학부모와 더불어 교육개혁을 실천하고, 전교조 합법화를 앞당기기 위해 복직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② 나라 밖에서 인정받은 전교조
전교조는 전 세계 교원들의 조직인 EI의 가입을 추진하기로 하고 6월 14일 가입신청서를 제출하였다.

EI는 9월 29일부터 10월 1일까지 벨기에 브뤼쉘에서 집행위원회를 개최하고 집행위원 25명중 22명의 찬성으로 전교조의 EI 가입을 의결했다. 이로써 나라안에서 합법적 지위를 보장받고 있지 못한 전교조가 나라 밖에서 먼저 공식적인 지위를 확보하는 아이러니가 빚어지기도 했다.

4. 94년 11월 전국노동자대회에서 민주노총 준비위를 발족
- 94년 상반기 투쟁의 중심에 선 것은 철도노동자들의 연대파업투쟁이었다. 94년 6월 「전국기관사협의회」소속 철도노동자들과 지하철 노조의 연대투쟁은 “공기업 3% 임금억제 정책 철폐”, “근로기준법의 준수”, “해고자 원직복직” 등 공동요구에 기초한 공동파업을 전개함으로써 업종별 공동투쟁의 새로운 모범을 창출.
- 사무․전문직 노동자들은 ‘업종별 교섭’, ‘사회개혁투쟁’, ‘단일 산별노조의 건설 및 연맹의 합법화’라는 형태로 민주노조운동의 새로운 경험을 축적시켜 나감. 병원노련과 전문노련은 기업별 노조체계하에서 집단교섭을 성사시킴으로 업종별 공동투쟁의 가능성을 보여주었으며, 전국과학기술노조, 전국의료보험노조 등은 단일 산별노조(소산별)를 건설하고, 합법성을 쟁취함으로써 산별노조 건설의 전망과 가능성을 현실로 보여줌.
- 뿐만 아니라 사무·전문직 민주노조운동의 경우, 의료제도의 개선, 완전한 사회보장의 실시, 언론 민주화 등 사회개혁 요구를 전면에 내세움으로서 노동조합의 사회적인 역할을 부각시키고, 노동자의 정치의식을 고양시킴.
- 94년, 공공부문 노동조합운동이 활성화됨. ‘공공부문’이라는 이유로 노동3권마저 심각하게 제약당해 왔던 공공부문 노동자들은 94년 상반기 철도노동자들의 연대투쟁을 출발로 한국통신 노동조합의 민주화, 조폐공사 노조의 파업투쟁 등을 계기로 공공부문에서의 민주노조운동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마침내 11월 4일에 142개 노조, 21만 조합원을 포괄하는 「공공부문노조 대표자회의」를 결성함.
- 87년 이후 민주노조운동을 통해 성장한 수천의 대중 지도력과 대중적인 공동투쟁의 경험, 계급의식의 발전은 새로운 형태의 단결을 요구하였다. 더우기 민주노조 사수 투쟁이라는 방어적인 투쟁과 시기집중에만 머무는 소극적인 전술을 뛰어넘어 총자본과 총노동의 대립을 실질적인 투쟁 전선으로 전화시켜 내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기업별 노조의 틀로는 더이상의 계급적인 단결과 공동투쟁을 조직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한편 대중적인 어용노총 탈퇴운동은 민주노조운동이 명실상부하게 노동조합운동의 조직적 구심으로 서 나갈 것을 요구하였다. 94년 11월 13일, 「민주노총 준비위」는 이러한 배경에서 출범하였다.
 
▣ 94년 ‘현장 중심’의 제 2기 전교조 선언
① 현장 중심의 제2기 전교조 선언
- 3월 새봄과 함께 전교조 해직 교사 1,491명이 교단으로 복귀하면서 교직사회는 새로운 변화를 예고했다.
- 2월 대의원 대회에서 94년을 전교조 제2기로 선언하고, 참실/자료/교권사업 등을 강화하기로 하는 등 현장 중심의 사업들을 주요사업으로 결정했다. 이 같은 사업은 전교조가 건재함을 과시하는 계기가 되었다.
- 5월 개최된 교사대회에 1만여명의 교사들이 참여함으로써 ‘해직교사 교단 복귀로 일부 극소수 해직교사 단체로 전락했다'는 정부의 왜곡 비방을 무색하게 하였다.
- 95년 올바른 교육개혁을 촉구하는 교사선언으로 다시 공개적인 활동에 나섰다. 95년 5월 10일 서울교사 100인이 “현장교사들을 개혁의 주체로 내세울 것"을 촉구하는 교사선언을 시작하여 전국적으로 교육관계 악법 개정을 위한 교사 6,000여명의 서명을 받아 11월 국회에 청원을 했다.
- 95년 6월 27일 지자제 선거에 전교조 후보 기초의회 3명․광역의회 2명 등 5명 당선,
교육위원 선거 서울 2명, 광주 1명, 전남 1명 등 4명의 전교조 후보 당선
- 한편 교사들은 95년 7월 18일 검찰의 ‘5.18관련 고소/ 고발 사건'에 대해 학살 책임자 58명에 대해 '공소권 없음' 결정이 내려지자 ‘진실을 가르치고 싶다'는 선언 및 ‘5.18 특별법 제정'과 학살자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는 교사선언이 잇따랐다. 8월 30일 전남지역 407명의 교사들의 선언으로 시작된 5.18 교사선언은 10월 30일까지 전국적으로 2,080여 개교 1만1,500여명의 교사들이 선언에 참가하기도 했다.
- 국제적으로도 전교조 합법화를 촉구하는 연대 지지가 이어졌다. 우선 유엔은 95년 5월 19일 ‘즉각 법을 개정해 교원노조를 인정할 것'을 촉구했으며, EI, ILO등에서도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교조 합법화를 촉구하는 서한을 발송하기도 했다.

② 10년 노동 운동의 성과 민주노총 출범
10월 31일부터 11월 2일 사이 지역별로 치러진 제14차 대의원대회에서 민주노총 가입을 결정했으며, 11월 12일 여의도 광장에서 민주노총 창립 노동자대회에 3,000여명의 교사들이 민주노총의 출범을 함께 했다.

5. 95년 11월 11일 전국 민주노동조합총연맹 건설
① 우리는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조합운동의 역사와 전통을 계승하고,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보장하는 참된 민주 사회를 건설한다.
② 우리는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실현하고 제민주세력과 연대를 강화하며, 민족의 자주성과 건강한 민족문화를 확립하고 민주적 제권리를 쟁취하며 분단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실현한다.
③ 우리는 미조직 노동자의 조직화 등 조직 역량을 확대 강화하고, 산업별 공동교섭, 공동투쟁 체제를 확립하여 산업별 노동조합을 건설하고 전체 노동조합운동을 통일한다.
④ 우리는 권력과 자본의 탄압과 통제를 분쇄하고 노동기본권을 완전 쟁취하며, 공동 결정에 기초한 경영참가를 확대하고 노동현장의 비민주적 요소를 척결한다.
⑤ 우리는 생활 임금의 확보, 고용안정 보장, 노동시간 단축, 산업재해 추방, 모성보호 확대 등 노동조건을 개선하고, 남녀 평등 실현 등 모든 형태의 차별을 철폐하고 안전하고 쾌적한 노동환경을 쟁취한다.
⑥ 우리는 독점자본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고 중소기업과 농업을 보호하며, 사회보장, 주택, 교육, 의료, 세제, 재정, 물가, 금융, 토지, 환경, 교통 등과 관련한 정책과 제도를 개혁한다.
⑦ 우리는 전세계 노동자와 연대하여 국제 노동운동 역량을 강화하고 인권을 신장하며, 전쟁과 핵무기의 위험에 맞서 항구적인 세계평화를 실현한다. (민주노총 󰡔강령󰡕 가운데서)

- 민주노총의 출범은 87년 이후 한국 노동조합 운동사에서 한국노총에 반대하는 민주노조운동(이념적으로 자주, 민주, 연대, 변혁지향성, 민주노조 총단결 노선)이 정권과 자본의 탄압을 이겨내고 승리를 쟁취한 것이다.
- 민주노총의 출범은 노동조합 운동의 ‘질적인 전환을 준비하는 조직적 구심체’라는 점에서 그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다. ‘질적인 전환’이란 기업별 노동조합체계를 극복하여 전계급적 단결을 강화해 나갈 수 있는 산업별 단일노조 건설을 의미하고, 나아가 그간 반어용노총전선이라는 성격을 뛰어 넘어 대안적인 사회세력으로 발전해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 민주노총은 95년 11월 창립한 이후 조직확대 및 산별노조 건설 사업에 박차를 가해왔다. 이 과정에서 중간노조나 한국노총 소속노조들이 민주노총에 가입하여, 약 10만여 조합원이 확대됨.
- 97년에는 민주금융, 민주버스, 민주택시가, 이어서 민주관광, 민주섬유도 민주노총에 새로 가입.
- 민주노총건설 이후 노동법개정 및 각종 법개정투쟁, 사회개혁투쟁, 노동자생존권쟁취투쟁 지속적 전개.
- 특히 96년 12월 정부의 노동법 날치기 통과에 맞서 96년 말부터 97년 새해까지 연 500만명이 참여하는 위력적인 전국노동자 총파업 투쟁을 전개하였다.
- 전국적인 노동자 총파업 투쟁으로 민주노총은 노동운동의 명실상부한 실체로서의 지위를 인정받고 국민들로부터 지지를 획득하는 등의 정치적 성과를 이루었다. 

6. 노동자 정치세력화 사업
- 87년 대투쟁을 통하여 등장한 한국의 노동자들은 민주노총의 건설과 총파업투쟁을 거치면서 한국사회의 주요한 세력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리고 지난 10여년 간의 민주노조 운동을 통해 경제적으로 높은 수준을 단결력을 보여왔으나 정치적으로는 한 목소리를 내지 못해왔다. 특히 선거시기가 되면 지역특성에 따른 투표로 일반국민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여왔다. 이제 우리 노동자들을 임금인상, 근로조건 향상 등의 경제적인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영역에서의 단결을 위해서라도 정치세력화는 반드시 이루어야 할 것이다.
- 민주노총은 95년 출범이후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국민과 노동자의 사회, 정치, 경제적 지위 향상을 위한 사회개혁 투쟁을 전개해왔고, 지자체, 국회의원 총선에 대한 대응도 강화해 왔다.
- 노동자의 정치세력화 과제가 이제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중차대한 과제라는 인식이 96, 97 노동법 개정 총파업 투쟁을 통해 더욱 확산되었다.
- 따라서 민주노총은 97년 대선, 98년 4월 지자체 선거에 적극 참여하였음.
- 민주노총은 지난 97년 대선시 민주노총의 권영길 1기 위원장이 대통령후보로 나가, 민주노총의 정치세력화 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또 98년 지자체 선거에도 정치세력화를 위해 적극 참석했다.

 
▣ 1996년 이후 전교조 주요일정
- 1996년 2월 전교조 초등위원회 19시간 법제화 서명(95년 9월부터 전국 16,162명 초등교사 참여)
5월 5~15일 교육주간행사. 어린이 날 행사 전국 63개 지역 개최
- 1997년 4월 29일 제7대 김귀식 위원장 등 7개 지부 현직 교사가 지부장 당선.
5월 25일 EI, 김영삼 대통령과 진념 노동장관에게 [전교조 인정]촉구하는 서한 전달
6월 2일 김귀식 위원장 정직 2개월 등 현직교사 지도부 12명 징계 받음
6월 9일 김귀식 위원장 ILO총회 참석
-1998년 2월 4일 EI,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에게 전교조 합법화 촉구
2월 6일 노사정위원회, 교원노조 99년 7월부터 합법화(법제화는 98 정기국회) 합의
5월 14일 김귀식 위원장, 이해찬 교육부장관과 공식 면담, 교육행정체계 개편 등 교육개혁 촉구
7월 16일 교육부, 전교조 활동 관련 미복직 교사 160여명 복직방침 발표
7월 29일 전교조 이동진 부위원장, EI(세계교원노동조합총연맹) 집행위원으로 피선
9월 1일 전교조 활동 관련 미복직 교사 128명 복직 (99년 3월 복직 희망자 포함)
9월 10일 [교육개혁과 올바른 교원정책 수립을 위한 전국교사서명] 시작
10월 31일 2기 노사정위원회, [교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교원노조법)안 합의
11월 7일 교원노조법안 정부 입법 예고
11월 23일 대통령 주재 국무회의, 교원노조법안 의결
12월 11일 교원노조법안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 상정
12월 14일 교원 84,424명, [교원노조 법제화 및 주요 교육개혁과제 수립 요구] 서명 결과 국회에 청원
12월 29일 교원노조법안,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통과
- 1999년 1월 6일 [교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 국회 통과
7월 1일 전교조 합법화 !
- 2000년 : 단체교섭 투쟁 (현수막 걸기, 버튼 달기 등등)
- 2001년 : 7차교육과정을 핵심으로 한 신자유주의 교육구조조정 저지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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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08-11-19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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