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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 - 수기
북한을 탈출하는 것은 목숨을 건 도전과 실패의 연속
탈북자 이진옥 

중국으로 돈벌이를 갔다는 주인집 여자는 4명의 아이들을 남겨 두고도 돌아올 줄을 몰랐다. 서너 달에 한번 씩은 왔다 갔다 해서 지금쯤은 돌아올 때도 되었다는데 도무지 오질 않는다.

하긴 안면일식도 없는 주인집 여자다. 다만 한번 주인집 여자의 신세를 졌다는 영희네 엄마가 소개해 준 손바닥만한 종잇장 하나를 들고서 그 여자를 기다렸다.

집주인은 아이들 4명을 매일 밥을 해 먹이고 빨래 해가며 거기다 돼지까지 키우기에 지쳐있던 터라 나를 약간 의심스러운 눈으로 맞아주었지만 중국 연변에 사는 이모를 만나기 위해 왔다는 말과 ‘소개장’을 보고서는 아예 살림을 맡겨버렸다.

다행이었다. 기나긴 12일간의 기차 여행에 영희네 엄마가 챙겨준 여비까지 다 쓰고 빈 몸이라 나가라고 해도 살려주십사 하고 빌붙을 처지였기에 너무 고마워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국경이라고 하지만 작은 시골마을 도시와 많이 떨어진 동네에서 자라 온 애들은 착하고 순진했다. 두 살 터울로 제일 큰 애가 14살이고 이렇게 위로는 딸 3명이고 막내가 남자앤데 말도 잘 듣고 반찬도 투정 없이 주는 대로 잘도 먹었다.

애들을 밥 먹여 학교 보내고 돼지에게 사료 주고 동네에 몇 안 되는 집 안에 펌프가 있는 집이라 물을 길러 온 동네 아주머니들과 외지에서 온 ‘왜가리’들과 수다를 한참 떨고….

그러다보면 가끔 국경경비대 군인들이 머리를 들이밀고 도강 할 사람이 없는지 탐문한다. 희한한 광경이다. 하긴 여기 와서 처음 듣는 언어가 많았다. 집주인이 녹음기를 틀어놓고 흥얼흥얼 노래를 따라 부르는데 물어보니 중국 연변 노래라고 했다. (후에 알고 보니 한국의 트로트였다.)

도강이요, 브로커요 이런 말도 고향에서는 전혀 들어보지 못한 생소한 말이다. 애까지 데리고 가면 돌아오지 않을 확률이 높기 때문에 안되고 강을 건너가서 친척을 만나고 돌아오겠다면 돌아 올 시간까지 약속하고 보낸다니 여긴 확실히 딴 세상이다.

제일 무서운 내부 고발자가 없어서 편했다. 너도나도 가는 것을 목적으로 한 사람들이기에 그런지도 모르지만 동네 사람들도 ‘왜가리’들도 서로를 동정하고 함께 갈 길을 의논했다. 좀 더 마음을 터놓는 사이가 되면 전문적으로 그 일을 맡아한다는 브로커도 소개해주고 돈도 사이좋게 함께 나누어 먹는다고 한다.

그뿐인가! 어느 군인이 언제 어디서 근무를 서는데 언제 돌아오면 된다고 친절하게 스케줄 관리까지 해준다. 문제는 이미 90년대 초반부터 강 넘기를 제집 드나들 듯이 했다니까 벌써 10년이 가까워 온다.

고향에서는 국경지역의 이런 사정엔 전혀 깜깜이고 친척의 도움은커녕 혹여 편지라도 올까 한없이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이래서 앉아 있는 똑똑이보다 돌아다니는 머저리가 더 낫다는 말이 생겼나 싶을 정도다. 하긴 아는 사람이라고 해도 이런 이야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지.

이 동넨 확실히 딴 세상이다. 고향에서는 옥수수 국수죽이란 게 등장했는데 그래도 이 동네선 웬만한 집이면 강냉이밥이라도 밥을 먹으니 시내가 뭐 부러울까?

시내 장마당에선 기껏해야 밀가루 빵이 고급인데 여기선 똑같은 값을 지불하고 중국에서 나온 이름마저 낯선 고급빵만 먹는단다. 시내에서는 중국에 들여간다고 비싼 낙지나 명태가 오히려 바다 먼 여기가 더 싸니 뭐라 해야 할까.

아무튼 희한한 여러 가지 일들을 목격하며 그럭저럭 한 달을 넘겼다. 그런데 날이 가고 시간이 흐를수록 주인집 양반의 기색이 편치 않아 보인다. 아줌마가 제 기일을 지켜오지 않아 불편한지, 아니면 낯도 모를 낯선 여자가 한 달을 공짜 밥을 축낸다고 생각해서인지.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주인집 남자가 대낮에 술을 거하게 퍼 마시고 밖으로 나가 “여기에 중국으로 도망치려는 여자가 있다.”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다. 너무 놀라 심장이 떨어질 뻔한 나는 신도 못 신고 그 사이 안면을 익힌 해주아줌마의 집으로 급히 피신했다.

사실 주인집 아줌마를 애타게 기다린 건 남편보다 나였다.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는데…. 오라는 사람은 오지를 않는데 엄마 품에서처럼 편히 잠든 막내를 내려다보며 오만가지 생각에 잠 못 이룬 밤이 얼만데….

벌써 이 동네에 온 지도 40일이 되어간다. 도강을 하지 않으면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돌아간다고 반겨 줄 사람도 없고 또 돈도 한 푼도 없는 몸에 집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어디서 잘못 될지 불 보듯 뻔했다.

죽어도 넘어가다가 죽든지 시도라도 해봐야 할 판국이다. 마침 나처럼 너무 오래 기다린 또 한 명의 여자가 있었다. 알고 보니 한 고향 사람이었다. 강 건너 보이는 바로 앞 동네에 그 여자의 사촌이 살고 있단다. 작년인가 한 번 건너갔다온 경험도 있다 한다.

그뿐인가? 내가 이모의 전화번호도 모르고 직장과 이름만 알고 있다고 하니까 자기 사촌만 만나면 도움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브로커의 도움도 없이 겁도 없이 이 길을 택한 데는 고향 아줌마의 말도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제 생각해보니 너무 절망적이다 보니 내가 정신이 나갔었던 것 같다. 나중에 어떻게 감당하려고… 간 큰 일을 벌였는데 이미 늦었다. 산 중턱에 앉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아줌마를 찾고 있다보니 만 가지 감정이 교차한다.

저기 아래로 ‘왜가리’들이 서있던 자리가 보인다. 바로 눈앞에 손 잡힐 듯이 ‘개산툰’이란 동네도 빤히 바라보인다. 강 건너 동네서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사람을 가리키는 ‘왜가리’도 보인다. 함경북도에 오니 희한한 말들이 많다.

배낭을 메고 식량구입을 가는 걸 두고 함경남도 사람들은 ‘식량공작’을 간다고 하는데 함경북도 사람들은 ‘행방’을 간다고들 했다. 한번 떠나면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는 의미에서 붙인 말이라는데 처음 들었을 때에는 웃겨 죽을 뻔했다.

시대를 풍자해 생겨난 신조어는 이 뿐이 아니다. ‘꽃제비’. 제비라고도 부르지만 정확한 의미는 거지다. 그러고 보니 시내엔 흔한 꽃제비가 이 동네엔 없다. 대신 이 동네 애들은 도강을 해서 연변 쪽 호텔 앞에 가서 남조선 사람들한테 가서 동냥을 해서 큰 몫을 챙긴단다. 거주 이전의 자유가 있으면 은근히 살고 싶은 생각이 드는 걸 어쩔 수 없다.

나처럼 한 푼도 없이 브로커에게 운명을 맡긴 사람도 많다. 그런데 운명까지 맡기고 기다리는 주인집 여자가 돌아오지 않고 이 상황까지 되다보니 내가 갈 길은 이미 정해졌다고 스스로 판단했다. 재수 없을 땐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고 했나?

하지만 이 상황에서 잘못되면 코가 깨어지는 것쯤은 비교가 될 수 없는 일이다.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담보로 하는 일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비장한 각오로, 죽기를 각오하고 떠났는데 그만 생사가 엇갈리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후에 들은 바에 의하면 함께 떠났던 아줌마 때문이었다. 함경북도 쪽엔 유난히 철길 옆으로 경사가 급한 곳도 많고 차굴도 많아 감시초소가 많은데 아줌마가 철길로 쿵- 하고 떨어지는 바람에 추워서 감시초소에 들어 가있던 두 군인이 소리를 내지 않고 가만가만 우리를 뒤쫓아 강을 넘었던 것이다.

한 명은 강둑에서 이쪽을 지켜보고 있고 총을 든 군인 한 명만 우리를 뒤쫓아 왔다. 짐승과 같은 소리를 지르던 고향아줌마도 붙잡혔다. 결국 그렇게도 가고 싶던 중국 땅에서 북한 군인들에게 잡혔다. 얼마나 급했는지 신발 한 짝을 잃은 것을 그때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하도 좁은 동네라 어둠 속에서도 총든 군인들에게 끌려오는 우리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래도 부끄럼보다도 더 큰 걱정과 고민은 조국을 배반한 자에게 주어지는 엄벌이었다.

항일운동에 참가한 외조부를 가문의 영광으로 생각했지만 이제 더 이상 나라의 ‘은혜’를 바랄 수 없다. 내가 왜 이 지경까지 되었는지 스스로 자문자답하며 국경경비대 초소로 끌려왔다. 이모를 만나면 인증문서로 내놓으려고 했던 사진 몇 장도 다 빼앗겨버렸다.

막내 동생 나이나 되었을까? 파랗게 젊은 경비소대장은 어깨까지 으쓱이며 ‘공로’를 세운 군인들을 치하하고 우리를 향해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반말 절반, 욕 절반으로 필요한 문건을 작성한 뒤 우리는 한밤중에 분주소(파출소)넘겨졌다.

무릎을 꿇고 앉아 뾰족한 구둣발로 사정없이 밟힐 때 나는 군인들한테서 받은 ‘대접’은 과분한 ‘접대’였다는 걸 실감했다. 그날부터 3일은 물 한 모금도 마실 수 없었다. 문풍지도 하지 않고 밖이나 다름없는 차디 찬 방에서 우리는 죄인으로 취급받고 있었다.

여기 온 지도 이틀이 지났다. 내일 밤만 지새우면 온성 집결소로 이송된다는 걸 안다. 돈이면 이 상황을 벗어날 수도 있겠지만 지인이라고는 단 한 명도 없는 타지에서 나는 요행을 바랄 수 없고 바라지도 않는다.

오직 재판 받고 감옥에 가기 전까지 벌어질 일들을 나름대로 상상하느라 손발이 얼어드는 것도 잠깐 잊고 있었다. 이 날이 바로 1999년 1월 6일이다. 집결소로 이송되기로 한 날인 1월 8일 나는 그토록 기다리던 브로커의 도움을 받아 6명이 함께 극적인 탈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중국에서 길고 긴 시간 동안 위와 같은 ‘탈출’과정의 반복 속에 또다시 극적으로 한국행을 시도했고 성공했다. 짧은 글에 많은 내용을 담을 수 없지만, 이렇듯 북한을 탈출하는 것은 목숨을 건 도전과 실패의 연속이다.

오늘 현재도 북한을 탈출하는 이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어딘가에 숨어서 불안에 떨고 있을 것이다. 그들 모두의 성공을 기원한다.

탈북자 이진옥(가명)

 

 

등록일 : 2012-05-16 (0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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