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봄 함남 요덕군 읍(邑)의 한 마을에 일본에서 손님이 찾아왔다. 군당(郡黨) 책임비서를 비롯한 간부들이 일본에서 온 교포를 성대하게 맞아주었다.

조총련계 교포인 그는 요덕수용소에서 풀려나 요덕읍에 살게 된 친척을 만나기 위해 북한을 방문한 것이었다. 난생 처음 북한을 방문한 그 교포는 북한에서도 오지인 요덕의 모습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는 요덕군의 풍경을 보고 ‘18세기 인디언 마을’로 돌아온 느낌이라고 말했다. 당시 재일교포들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북한을 방문하면 일본에서 북송된 가족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까지 찾아갈 수 있었다. 현지를 방문한 교포들은 북한의 실상을 보면서 북한에 대한 환상은 다 무너지고 가족을 북한에 보낸 후회와 죄책감으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북한당국은 재일교포들이 북한을 찾아와 주민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좋지 않고 당사자들의 사상이 변질된다는 이유로 1990년대부터 가족 방문을 원산과 평양으로 제한했다. 사상을 공유하는 조총련계 교포들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많은 조총련계 기업들이 북한에 투자했지만 단 한 개의 기업도 살아남지 못했다. 조총련계 상공인들 사이에서는 북한에 투자하면 100% 망한다는 ‘신념’ 같은 것이 생겨날 정도였다. 그들은 재산을 다 잃고서야 북한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조총련의 실패는 햇볕정책의 성공을 위한 참고서가 될 수 있었다. 김대중 정부 이후 북한과의 햇볕정책이 시작되면서 많은 기업들이 북한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북한에 들어갔다가 성공한 기업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모두 돈만 떼이고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쫓겨났다.

이제 ‘개성공단’이 김정일의 마지막 희생물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예전 같으면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지만 달러 고갈이 워낙 심각한데다 개성공단을 중단할 경우 북한당국이 다른 나라에서 투자를 받기가 어려워 질 수도 있다. 북한이 명맥상 개성공단을 계속 유지한다고 해도 이제 다시 북한과 거래할 한국기업은 사라질 것이다.

개성공단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지금의 북한체제가 등소평 시대가 아닌 마오쩌둥(毛澤東)의 시대라는 것을 한국정부와 기업들이 망각했기 때문이다.

개성공단의 근로자들은 자신의 월급이 얼마인지도 모르고 북한당국이 제공하는 6000원(2달러) 수준의 월급을 받는다. 한국기업이 제공하는 1인 월급 64달러의 대부분은 당과 군대의 운영자금으로 충당되고 있다. 근로자가 자신의 월급이 얼마인지도 모르고 일한다면 이것은 ‘노예노동’이다.

게다가 한국 기업들은 북측 인력을 관리할 수 없다. 국가안전보위부의 집중 감시로 북측 근로자들은 남한 사람들과의 대화조차 기피하고 있다. 괜히 간첩으로 몰릴 수 있기 때문이다. 식량난으로 점심도 못 먹는 근로자들을 위해 한국 근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도록 하자고 해도 북한당국은 거절하고 있다. 조총련 방문자들처럼 외부인을 북한주민과 직접 접촉하게 만드는 것은 결코 체제유지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북한은 체제유지에 피해가 없는 금강산 철조망 관광은 살리는 대신 개성공단을 폐쇄하고 그 책임을 ‘삐라’에 뒤집어 씌울 계산을 하고 있다. 체제불안 요소를 일시에 제거하려는 의도다. 인민군 정예부대 60만이 집결해 있는 황해도에 우상숭배의 허구를 폭로하는 삐라를 뿌리는 것은 김정일의 정신적 노예로 전락한 인민군의 총부리를 서울이 아닌 평양으로 돌리게 하는 효과가 있다.

마오 세상에서 불가능했던 개혁개방이 등소평 시대에 가능했던 것처럼 개성공단의 성패는 북한의 변화에 달려 있다. 삐라는 김정일 체제를 등소평 시대와 같은 체제로 바꾸는 중요한 수단 가운데 하나다. 이것이 자유를 박탈당한 채 침묵하며 살아온 북한 인민의 선택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한다. /강철환 기자 nkch@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