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神秘와 거짓 神秘

현대는 참과 거짓이라는 것을 말하기가 어려워진 시대라 할 수 있다.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이냐 하는 것은 판정을 내리는 사람에 따라 다르고 그가 속한 사회의 이념과 역사적 상황에 따라 달라질 뿐 아니라, 판정자가 속한 사회나 공동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모델에 따라 상황설정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쪽에서 참으로 여겨진 것이 저 쪽에서 거짓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더 나아가 한 사건 자체가 거짓을 둘 다 공유하고 있는 것처럼 양비론적 해석이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따라서 이런 사정을 감안한다면, '참' 신비와 거짓'신비'라는 제목은 다소 어색한 분위기를 연출해 낼 것이다. 신비면 신비지 거짓신비는 무엇이냐는 의문을 갖게 할 만한 제목이기 때문이다. 진리면 진리이고, 복음이면 복음이고, 신비면 그냥 신비지, 참 진리, 참 복음, 참 신비 등 앞에 '참'字를 붙이는 것 자체가 인간적인 약점의 표현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든다. 그러나, 참 신비를 신비로 고쳐 읽고, 거짓신비를 신비라 할 때 이를 '조작된 신비'라는 의미로 제한을 가한다면, 이런 종류의 의문은 그 강도가 한결 약해지리라 생각한다.

현대문명의 급속한 발달에도 불구하고 삶은 여전히 신비로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신비'로 불릴 수 있는 것과 신비 또는 '조작된 신비'를 구별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성서는 인간들이 하나님과 만나는 신비스러운 황홀경을 여러 곳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그 여러 신비체험기사들 가운데 공통적인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신비체험을 한 사람들이 한결같이 경외감을 갖고, 놀라워 할 뿐 아니라, 너무 너무 놀라 두려워하기까지 한다는 사실이다.

사실 하나님과의 만남, 거룩한 것과의 만남은 인간을 전율케 하고 두렵게 한다. 하나님과의 신비스러운 만남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두려운 떨림뿐일 것이다. 오토(R.Otto)의 간결한 용어를 빌린다면 이런 현상을 'Numinose'라 표현할 수 있다. 신적인 것과의 만남을 체험한 인간은 그래서 말문이 막힌다. 출애굽기 3장 6절에 보면, 가시나무 떨기가운데 하나님이 나타나자 모세는 이렇게 반응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모세는 하나님 보기가 두려워 자기가 얼굴을 가렸다." 또, 다니엘서 10장 11절은, 하나님의 사자가 다니엘에게 나타나, "다니엘아 내가 네게 이르는 말을 깨닫고 일어나라"고 하자, 다니엘이 "떨며 일어섰다"고 기록되어 있다.

마태복은 1장에서는 요셉이 두려워했고, 누가복음 1장 12정에서는 주의사자의 顯顯에 "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가 높은 산에 올라 변모하면서, 그 옷이 광채가 나고, 심히 희게 되었을 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그 광경을 목격하고 심히 두려워했다고 공관복음서는 보도하고 있다. 또 마가복은 16장에 따르면 무덤가에 갔던 세 여인들에게 주의 사자가 나타나,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해주자, 그 세 여인들이 모두"심히 놀라 떨며, 두려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사실 신비 체험은 사람의 말문을 막아놓고 깊은 침묵에 빠지게 한다. 두려워하기는커녕, 자신들의 체험담을 떠벌리며 자랑하는 요즈음의 모습들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여하간, 신앙에 있어서 신자들을 경외와 떨림으로 인도하는 이러한 '신비'는 여전히 분석될 수 없는, 분석의 차원을 넘어선 하나의 현상으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나는 이러한 의미의 신비를 진정한 의미의 참 신비라 부르고 싶고, 이러한 '神秘'를 정중하게 인정한다.

문제는 이것과는 다른 '거짓 신비' 또는 '조작된 신비'가 있다는 것이다. 본문 말씀도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 종교의 '조작된 신비'를 깨뜨린 것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다. 예루살렘 성전의 역사는 기복이 심했으나, 예수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속에 자신들의 신앙생활을 강화시켜주는 장소가 아니라, 자신들을 통치하고 힘겹게 하는 장소로 그 이미지가 굳어져 갔다. 대 제사장들은 종교稅, 인구세 등 막대한 세금을 백성들로부터 거두어들이는데 관심의 큰 부분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그들의 주요 정책 중 하나가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 매개물들을 많이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너희 백성들의 제사를 직접 받아주지 않으신다.' '우리 대 제사장들을 통해야만 한다.' '너희들이 제사용으로 밖에서 사온 비둘기는 인정할 수 없다' '너희들의 편의를 생각해서 흠 없는 비둘기만 성전 안에서 팔 터이니, 편하게 성전 안에서 사서 그 걸 바치면 된다.' 물론 그 값은 밖에서 사는 것보다 네 배 이상 비싼 것이었다. 돈도 미리 바꾸어 내야했다. 로마황제의 초상이 새겨져 있는 동전을 하나님께 드리면 모독이 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유대인 전용동전으로 바꾸어 내야했다. 물론 똑같은 액수로 환전해 주지 않고 두 배가 넘는 액수로 바꾸어 주었다. 이런 것들은 종교의 이름으로 백성의 어깨를 누른 몇몇 예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데, 이렇듯 수많은 방식으로 백성의 가는 허리를 조른 사람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당시의 대제사장들이었다.

대제사장들은 자기들의 부당한 신념과 행동을 효과적으로 유지하는데 종교가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종교기구, 종교의식을 신비스럽게 보이도록 만들어 놓고, 백성들의 의식 속에서 그 조작된 신비가 깊이 침투해 들어가, 백성들이 이를 마치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도록, 여러 가지 방법을 고안했다.

신성하지 않은 것 까지도 신성한 것으로 , 우발적인 일들도 하나님의 섭리의 결과로 이해하도록 교육시켰다. 경험적인 사회의 역사와 개개인의 생활사가 초경험적인데 근거를 두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도록 설득시켰다. 백성들은 그들 자신의 힘이나 의지나 결단과는 상관없는 아주 독립된 어떤 힘에 의해 살도록 운명 지어진 것처럼 느끼게 되었다. 이런 신비의 조작은 대제사장들이 자기들의 위치와 종교체제를 유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 을 해 냈다.

본문 말씀은 그들의 조작된 신비를 예수가 정면으로 거부하는 내용에 관한 것이다. 예수가 성전에 들어가 돈 바꾸는 자들의 탁자와 비둘기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었다고 성서는 보도하고 있다. 성전 장사는 지금으로 말하면 대규모 시장과 같은 성격의 것이다. 예수의 이 이야기는 그 성전 뜰의 작은 한 모퉁이에서 일어난 사건이요, 곧 잊혀 질만한 시시한 사건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독 그 사건이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기쁘게 전승되어 내려오고, 마가, 마태, 누가, 요한 등 네 복음서 기자가 모두 그 사건을 중요하게 취급한 것은 그만큼 그 사건이 주는 상징적인 교훈이 깊기 때문이다.

네 복음서가 모두 이 사건을 보도하고 있다면 본문인 마가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모습은 무엇인가?

해답은 16절 유독 마가만이 소개하는 구절이다. 다른 복음서에는 이 사건을 소개하면서도 마가의 16절에 해당되는 구절이 없다. 그동안 이이야기의 핵심은 줄곧 가려져왔다. 이 사건은 예수가 성전에서 벌어지는 상업행위를 금지시켰다는 데 초점이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런 식으로 이 사건을 해석하면, 그 핵은 언제나 가려지게 될 것이다. 물론 예수는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았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것일 뿐, 더 깊은 다른 것을 얘기하려는 것이다. 백성들에게 익숙한 어떤 생활의 단면에 충격을 가함으로써,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느낌을 상징적으로 전해주려는 것이다. 백성들이 알고 있는 쉬운 것에서 시작해서 백성들이 미처 알지 못하고 있는 교묘한 것을 드러내 보여주려는 것이다.

마가만이 소개하는 이 본문 16절은 "아무나 기구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지 않으셨다"고 되어 있다. 이 경우, 공동번역은 "또 물건을 나르느라고 성전 뜰을 질러 다니는 것도 금하셨다"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 두 번역은 모두 적절한 번역이라 할 수 없다. 여기서 '기구'라고 번역된 희랍어의 원 뜻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제사용 기구를 뜻하기 때문이다. 예수가 제사용 기구를 허락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聖殿의 祭祀적 기능을 중단시켰다는 뜻이 된다. 성전의 상업적, 경제적 기능을 중단시켰을 뿐 아니라, 그 종교적 기능까지도 중단시켰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성전 종교의 죽음을 선포한 것이 된다. 바로 그런 상업행위들이 대제사장들의 허가 하에 행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는 대제사장들을 본문 17절에서 '강도'로 규정한다. 성전을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곳이 아니라 '강도'의 소굴로 바꾸었다고 분노로 탄식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집은 그런 제사용 기구들의 사용 없이도, 만민이 누구나 자유롭게 기도드릴 수 있는 집이라고 선언했다. 장사꾼들을 고용하고, 거기다 종교적 의미를 붙여주고 그것으로 큰 이윤을 남겼던 대제사장들에게 있어서 이 선언은 그들의 삶의 근거와 중심이 취소되고 뒤집혀지는 충격이 되었다. 동시에 그들에게 괴롬을 당하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삶의 본래적인 의미와 참 신앙의 기회가 회복되고, 제공되는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소위 '성전 청결사건'으로 불리고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의 핵은 '성전청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성전청결'이라하면 선전체제는 그대로 놔두고, 그 체제 속에서 개선되어야 할 점들만 고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성전체제자체에 대한 거부이기 때문에, '선전청결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성전 무효화사건'으로 불려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 사건은 대제사장들을 중심으로 한 유대종교 특권층에게는 용납될 수 없었다. 결국 18절을 보면,"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어떻게 예수를 죽일까 의논했다"는 보도가 나오는데. 이는 당연한 귀결이었다. 결국 예수는 성전종교를 비판하시고, 바로 그 성전체제에 의해 죽음을 당하게 된다.

예수가 처형되자 곧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그 결정적인 장면에 난데없이 예루살렘 휘장이 찢어졌다는 보도가 튀어나온다. 바로 이 성전휘장은 대 제사장들이 조작한 신비중의 하나였다. 성전은 여러 차례 구획이 되어있어서 백성들은 각각 자기신분에 맞는 곳에까지만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초입에 이방인의 뜰이 있었고, 조금 더 들어가면 이스라엘 여인들의 장소, 더 들어가면 이스라엘 남자, 그 다음이 레위인, 이런 순서로 구획이 되다가 성전 맨 마지막에 휘장을 쳐놓고 그 곳에는 오직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다고 만들어 놓았다. 그곳이 바로 지성소라는 곳이었다. 오직 대제사장만이 그곳에 들어가 하나님께, 백성들을 대신해서 예배드릴 자격이 있다고 교육을 시켰기 때문에, 몇 백 년이 되도록 이스라엘 백성들은 추호의 의심도 없이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예수가 처형되는 사건과 함께, 그 성전 휘장이 찢어졌다. 그것도 우연히 조금 찢어진 것이 아니다. "맨 꼭대기부터 맨 아래까지 둘로"완전히 찢어졌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예수의 선교활동의 절정이자 결론이라 할 수 있다. 곧 이제는 아무도 더 이상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를 중재할 수 없다는 상징이다. 누구도 대제사장을 거치지 않고서도 직접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유대교의 제사장들과 기독교의 목회자들은 그 역할이 다르다. 혹 목회자들의 역할이 제사장들의 역할과 같다고 보고, 목회자들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매개해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명백한 오해가 될 것이다. 오히려 목회자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이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아무것도 개입할 수 없다는 것을 선포하고 알려주려는 사람들이다. 유대교의 대제사장들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개자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설득시키려 했던 사람들이라면, 기독교의 목회자들은 그러한 중개자들이 필요 없다는 것을 전파하려는 사람들이다.

여하간, 성전무효화사건이나 성전휘장이 갈라진 사건은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통이 가능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본문말씀이 전하려는 뜻의 전부가 아니다.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지금까지 휘장을 통해 신비를 조작해낸 대제사장들의 행위가 거짓이었음을 폭로시켜주기 위한 것이다. 매개물을 신비화시켜 자신들의 부당한 행위를 길이 유지하려 했던 대제사장들의 전략의 이면을 상징적으로 폭로하고 그것을 뒤흔들어놓은 사건이었다. 이로써 당시 사회의 수직적 계층 간의 담이 무너지게 되었다. 소위 거룩한 장소 지성소와 세속적인 장소의 벽이 무너지게 되었다. 이제 거룩은 지성소에서만 체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삶속에서도 체험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떤 종교제도나 제사용 기구도 불필요하게 되었다. 대제사장들의 조작된 신비의 그늘 밑에서 직접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없었던 백성들에게 이보다 더 놀랍고 충격적인 사건은 없었다.

이천년 전에 일어났던 이 이야기는 여전히 오늘 우리에게도 깊은 의미가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어느 틈엔가 우리는 또다시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매개물들을 많이 만들어 놓았다. 예수를 믿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것으로 착각하면서 유대교를 믿고 있는 신자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아니, 당시 유대교보다 더 많은 매개물들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 함께 모이는 행위자체가 교회인데 '건물'이 교회인 줄 알고 자꾸 건물에만 관심을 집중시킨다. 건물에 집중하는 것은 바로 유대교적 발상이다. 그것도 불필요한 안팎 치장에 건축비의 큰 몫이 할당된다. 예배기구들은 점점 더 다양해지고 정교해 졌다. 예수의 죽음과 함께 찢어졌던 그 휘장이 어느 틈엔가 슬슬 다시 꿰매어지기 시작한 종교현실을 생각하면, 안타까운 심정이 든다. 거짓 신비가 다시 조작되고 있다는 말씀이다.

파스칼은 팡세 82번에서 매개물이 주는 虛構를 이렇게 경계하고 있다. "으리으리한 궁전에서 4만명의 근위병에 둘러싸여있는 터키황제를 우리와 똑같은 하나의 평범한 인간으로 보기위해서는 대단히 맑은 이성을 가져야 겨우 가능하다." "법복과 법모를 쓴 재판관을 보기만 해도 우리는 그의 능력에 대해 유리한 선입관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사실 그렇다. 이 매개물들이 우리의 상상력의 방향을 결정해준다. 이 매개물을 실체와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아주 빈번한 예가 있다. "이 책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입니다." 하고 소개하면, 그 작품을 읽어보기도 전에 벌써 감동할 준비부터 한다. "갤브레이스 교수의 강연이 있다."고 간단히 소개하면 들을 생각도 안하다가, "갤브레이스가 하버드대 교수이다."하고 소개하면 설득될 준비부터 한다. 이런 것들이 모두 매개물에 굴복한 예가 된다. 이것저것 빼버리면 남는 것이 무엇이냐고 항변할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확신한다. 남는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한다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엔 그 어떤 것이 호리더라도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무엇이 없어서가 아니라 무엇이 많아서 문제가 생긴다.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대면과 직접적인 만남이 중요할 뿐, 그 어떤 매개물도 스스로에게 용납해선 안 될 것이다.

누가 매개물에 쉽게 집착하는 가?

바로 불안한 사람이 그러하다. 불안한 사람은 매개물이라도 보고 일단 일시적인 안심이라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개물이 있는 한 하나님은 없다. 사랑도 마차가지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 포옹할 때, 상대방을 서로 포옹하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 사이에 있는 매개물들을 포옹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두 사람사이의 매개물들이 일차적인 것으로 중요하게 인식되는 한 사랑은 언제나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나게 된다. 그것이 심화되면 두 사람은 모두 없어지고 매개물만 남게 된다. 반대로 매개물이 없어지면 둘은 서로를 의식하지 않고 하나가 된다. 하나님과 직접대면하기 불안한 사람은 다른 무슨 매개물을 찾는다. 그러나 매개물만 크게 보일 분, 하나님은 작게 보이거나 아니면 전혀 보이지 않게 된다. 따라서 매개물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수단이 된다. 불안한 사람이 만들어내는 하나님, 불안한 사람이 집착하는 하나님은 오직 임시변통의 하나님이 될 뿐이다. 이러한 하나님상은 대단히 불충분한 것이다.

우리가 아름다운 섬을 향해 배를 타고 가면서 그 섬을 감상할 때, 그 섬으로부터 큰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 황홀의 강도가 깊어지면 그 섬과 우리는 하나가 되어, 우리자신이 배를 타고 있다는 사실도 잠시 잊어버린다. 그러나 그 배가 난파를 당해, 우리가 그 섬 쪽으로 헤엄쳐 가고 있다면, 그 때 그 섬은 이미 그 이전의 섬이 결코 아니다. 난파되었을 때, 그 섬은 안전성을 대표하고 있고, 현재의 불안을 구원해 줄 상징이 되고 있다. 섬 자체가 아름답든 흉하든, 그런 것은 더 이상 문젯거리가 될 수 없다. 섬이 아니라 우리가 더 급하기 때문이다. 급할 때는 섬을 섬답게 보지 않고, 섬을 섬의 입장에서 보지 않고, 우리 중심으로 마구 보려 한다. 난파되었을 때 찾는 섬은 불안감 때문이고, 이 불안감 때문에 생긴 감정은 불안감이 없을 때 가졌던 감정에 비해 훨씬 더 주관적이고 이기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이미지로 섬을 볼 때, 그 섬은 임시변통의 섬이 된다. 헤엄쳐서 그 섬에 도달하고 나면 불안도 사라지고, 집에 돌아가고 나면 그 섬은 곧 불필요한 것으로 잊혀 져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불안한 때는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보지 못하고, 내 불안을 해소시켜주는 도구로만 보게 된다.

두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상태, 아니 두려움에 담대한 상태라야 하나님이 제대로 보인다. 그때는 하나님이 인간 공포 해소의 대용물 따위로 보이지 않게 된다. 건강한 신앙인은 어떤 매개물도 인정하지 않는다. 불안할 때 집착하게 되는 매개물이 우리의 의식 속에서 부차적인 것으로 밀리고, 결국 완전히 잊혀 질 때에라야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거리가 없어진다. 사도바울은 이런 신비한 상태를 이렇게 훌륭히 고백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가 내 안에 거하고 있다." 이 말은 의미심장한 선언이다. 내가 전적으로 주님께 소속되어 있으나, 주님역시 내개 소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주님 없이는 내가 살 수 없지만, 반대로 내가 없으면 주님도 없다는 얘기다.

매개물이 없어질 때 나와 그리스도는 이토록 철저히 하나가 된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8장 6절에서 "죽는 것과 사는 것이 모두 그리스도와 함께 이루어지고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것이 산자와 그리스도가 신앙으로 합일된 신비한 상태가 된다. 이것이 둘 사이에 거리가 폐지된 상태이다. 이런 상태에는 종교적인 어떤 건물이나 기구라는 매개물이 개입될 여지가 없어진다.

요컨대, 소위 성전청결사건이나 성전휘장이 찢어진 사건은 모두 바로 이 매개물들의 기능을 중단시키고 그것들을 무효화시킨 사건들이라 할 수 있다. 바라기는 오늘의 사업화 되어가고 있는 종교현실에서, 매개물들이 중요하게 부각되려 할 때마다, 더구나 그것들이 교리의 이름으로, 우리와 하나님의 신비한 합일을 막으려 할 때마다 그것들이 어떤 종류의 것이든, 우리는 그것들을 단호히 거부해 나가야 할 것이다. 이것이 크리스천 목회자들이 끝끝내 고수해야할 최후의 양심이 아닐까 한다.

* 목회자라는 이름의 매개물(천당 문 막이)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 목에 연자맷돌을 달아 깊은 바다에 던지울 것이다.

(님께서는 참 神秘의 순례자의 길을 함께 동행 하셨습니다. 살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