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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20일   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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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중임에도 자유를 키워간 한국, 죽여간 북한
조갑제 

오늘은 한국전 휴전 65주년이다. 전쟁중인 나라이다. 그럼에도 국민 기본권이 이 정도로 유지되고 있다. 북한정권은 전쟁중임을 이용하여 인민들을 노예화하였다. 한국은 전쟁중임에도 자유를 탄압하지 않았다. 그 차이가 천국과 지옥으로 나타난 셈이다. 문제는 한국인을 행복하게 만들어준 恩人들을 다수 한국인들이 원수로 여기고 한국인들을 말살한 이들을 좋아하고 그들과 민족공조하겠다는 이들의 존재이다.


   김일성이 소련과 중공의 후원을 받아 同族을 치는 민족반역적 南侵을 하였을 때 한국은 孤立無援이었다. 한미동맹도, 주한미군도 없었다. 남로당 당원은 수십 만 명이나 되었다. 압도적 군사력으로 그것도 기습을 당하였으니 李承晩 정부는 무너졌어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李 대통령은 노인과 어린이까지 몽둥이라고 들고 싸우겠다고 미국에 통보하였다. 미군이 북한군과 교전을 하기 시작한 7월5일까지의 열흘간 한국은 중국 소련 북한을 상대로 1 대 3으로 버텨냈다. 2000년 민족사의 가장 영광되고 영웅적인 장면이다. 이를 內戰이라느니, 동족상잔이라고 폄하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반역이다.
  
   세계 學界가 동의하는 한국전 결정설
  
   한국전이 냉전 승리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은 정치인과 기자들뿐 아니라 한국 학자들을 제외한 세계의 거의 모든 학자들이 동의하는 정설(定說)이 되었다.


   헨리 키신저(닉슨 정부 때 안보 보좌관. 美中 화해의 주역)는 《외교》라는 저서(著書)에서 이렇게 썼다.


   <(공산주의자들이) 도전하였을 때 미국 정부는 기존의 전략을 폐기하고 맞서기로 결정하는 용기를 보였다. 한국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점령되면 아시아에서 미국의 입장, 특히 일본과의 중대한 관계가 약화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미국은 세계의 지도국이 되기 위한 첫 번째 시험에서 합격하였다.>

  
   카터 대통령 때 안보보좌관을 지낸 전략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큰 장기판》이란 책에서 냉전에서 자유진영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를 지정학적(地政學的)으로 설명하였다. 소련과 중공을 중심으로 한 공산진영이 유라시아 대륙의 중앙부를 차지하였지만 미국을 위시한 자유진영은 그 양단(兩端), 즉 서유럽과 극동에 교두보를 구축하고, 1949년 소련에 의한 베를린 봉쇄와 1950년 북한군의 38선 돌파를 무력화(無力化)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한국전에서 미국과 소련은 핵무기 때문에 제한전을 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非군사적 분야에서 결판을 지어야 한다.


   <정치적 활력, 이념적 융통성, 경제적 역동성, 그리고 문화적 매력이 결정적 요인이었다. 미국이 이끈 연합세력은 단결을 유지하였지만 소련-중공 진영은 분열하였다. 민주진영은 유연성이 있는 데 반하여 공산진영은 서열적이고 독단적이어서 오히려 부서지기 쉽다는 점을 입증하였다. 소련은 문화적으론 위성국가들로부터 경멸을 받았지만 미국은 우방국들로부터 존경과 찬사를 받았다.>


   한반도에서 소련의 제국주의적 팽창을 막은 한국인들은 휴전 하의 경제·정치·문화 경쟁에서 북한에 이겼고, 이것은 자유진영의 우월성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었다. 공산진영을 東과 西에서 감제하는 초소 및 자유진영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쇼윈도 역할을 한 것이 베를린과 서울이었던 것이다. 냉전 시대 서독과 한국을 지켜낸 아데나워와 李承晩은 세계사적 차원의 반공지도자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영국의 유명한 좌파 학자인 에릭 홉스봄은 《극단의 시대》(1914~1991, 세계사)에서 냉전을 ‘제3차 세계대전’이라고 불렀다. 한국전과 같은 정규전, 월남전과 같은 비정규전, 그리고 혁명과 심리전과 이념전쟁이 45년간 이어졌다. 1953~83년 사이 약 100건의 전쟁과 군사충돌이 있었고 약 1900만 명이 죽었다. 홉스봄은 900만은 동아시아에서, 350만은 아프리카, 250만은 남아시아, 50만은 중동에서 죽었다고 계산하였다. 가장 큰 희생은 한국전이었다(인구 3000만 중 300~400만 명이 사망).
  
  
   서독과 일본이 미국 측에 붙은 게 결정적
  
   홉스봄은 이 ‘3차 세계대전’에서 소련이 패배한 주요 이유는 세계 최고의 공업력을 가진 독일과 일본이 경제부흥과 재무장을 한 다음 미국 편에 선 것이라고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여러 나라는 이 두 전범(戰犯) 국가를 약화시키는 데 목표를 두었지만 한국전이 일어나고 미소(美蘇) 대결이 본격화되자 독일과 일본의 재기(再起)를 눈감아주게 된다. 소련의 위협에 노출된 자유진영은 독일과 일본이 미국의 통제 아래 들어간 데 안도하였기 때문이다. 홉스봄은 1949년에서 1953년 사이 일본의 제조업 생산력이 배증(倍增)한 것은 한국전 특수 덕분임을 강조하였다.


   한국전쟁 시기 일본이 경제부흥을 하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인데,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나 연구서를 찾기 어렵던 차에 1985년에 나온 세 권짜리 맥아더 전기(傳記) 《THE YEARS of MacArthur》를 읽었다. D. 클레이턴 제임스가 쓰고 휴턴 미필린 출판사에서 낸 전기의 제3권은 ‘승리와 재앙’이란 제목인데, 여기서 흥미로운 통계를 발견하였다.


   ‘일본에 끼친 한국전쟁의 영향’이란 소제목 하의 글에서 저자(著者)는 한국전쟁 시기, 일본은 유엔군의 병기창 역할을 하였다고 요약하였다. 전쟁이 나기 전, 1950년 봄 일본에 주둔한 미군은 6만 명이었다. 전쟁이 터지자 미국은 그해 9월까지 한국과 일본에 25만 명의 미군을 배치하였다. 1953년 1월까지 유엔군(육해공군)은 35만의 미군, 기타 연합군 4만 4000명, 한국군 37만 여 명 등 모두 76만 8000명에 달하였다.


   일본은 한국에 투입되는 유엔군의 훈련장이 되었다. 1952년까지 일본엔 2500개소의 각종 미군 시설이 들어섰다. 육해공군을 위한 훈련장, 특수전 학교, 사격장, 병원, 휴양소, 항만시설, 무기고, 공병 시설 등등. 건설 붐이 불었다. 미국의 기술과 자금이 일본의 노동력과 결합되었다. 주일(駐日)미국 대사 로버트 머피는 ‘놀라운 속도로 일본 열도는 거대한 보급창고로 변하였다. 이게 없었더라면 한국전쟁은 수행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고 했다.
  
  
   한국전의 병기창이 된 일본
  
   1947년에 맥아더는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는 조치를 취하였다. 작전명은 롤업(Roll-up). 태평양 전쟁 때 태평양 전선에 버려진 무기 및 장비들을 회수하여 수리하는 일이었다. 한국전이 나자 이 무기들이 전선에 투입되었다. 무기 및 장비들을 수리하는 일감이 일본 회사에 넘어갔다. 한국전 초기 넉 달 동안 일본 회사 등은 48만 9000정의 소화기(小火器), 1418문의 대포, 3만 4316개의 통제장비, 743대의 전투 차량, 1만 5000대의 일반 차량을 출고시켰다.


   전쟁에는 군수분야에 많은 인력이 투입된다. 맥아더 사령관은 이런 일을 주로 일본 인력에 맡겼다. 그들을 사용할 수 없었더라면 미군은 약 20만~25만 명의 추가 병력이 필요하였을 것이라고 한다. 일본의 해상보안청 소속 기뢰제거 기술자 등은 유엔군이 북진할 때 한국전선에 투입되었다. 일본의 해운 철도 기술자들도 유엔군 소속으로 한국에서 활동하였다.


   맥아더는 한국전이 시작되자 일본주둔 군수사령부를 창설하였다. 한국전선에 필요한 물자를 일본에서 조달하기 시작하였다. 일본 회사와 계약한 구매 액수는, 1950년에 1억 8400만 달러, 1952년엔 8억 2400만 달러, 1953년엔 8억 600만 달러에 이르렀다. 당시 일본의 연간 수출액은 10억 달러 수준이었다.


   미국은 미군과 한국군, 그리고 다른 연합군을 위한 무기 및 장비뿐 아니라 한국인을 위한 구호물자도 일본에서 구매하였다. 이런 자금은 미국 정부와 원조기관에서 나왔다. 특별자금으로 구매된 물자의 액수는 1950~55년 사이 17억 달러에 달하였다(편집자 注: 군수사령부가 구매한 액수와 중복되는 부분이 있는지는 불명).


   토요타 자동차 회사를 예로 든다. 이 회사는 1950년 6월엔 304대의 트럭을 생산하였다. 한국전이 터지고 군수용 주문이 쇄도하여 1951년 3월이 되자 매달 1500대씩 만들었다. 토요타의 가미야 소타로 사장은 이렇게 말하였다.


   “미군의 주문은 우리 회사의 구세주였다. 기쁘기도 했지만 죄 짓는 기분이 들기도 하였다. 다른 나라의 전쟁을 즐거워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미군의 특별자금 구매액의 약 10%는 일본이 생산하는 무기, 탄약, 장비를 사는 데 쓰였다. 이는 일본 무기 산업의 부활을 촉진하였다. 극동사령부는 태평양 전쟁에 동원되었던 약 1000개의 군수제조업체를 폐쇄시켰는데, 한국전이 일어나자 생산을 재개하도록 하였다. 1950년 8월 미국 합참은 ‘만약 세계 전쟁이 일어난다면 일본의 군수산업 능력을 미국이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입장을 정하였다.


   전쟁물자 생산 이외의 분야에서도 일본은 돈을 많이 벌었다. 일본으로 온 유엔군 소속의 군인들이 다양한 목적으로 돈을 썼다. 이들이 개인적 목적으로 쓴 돈은 하루 평균 100만 달러에 이르기도 하였다. 요코스카 항 주변에선 일본 매춘부가 1500명으로 늘었다.


   한국전이 시작되었을 때 일본의 제조업 생산량은 전전(戰前, 1934~36)의 3분의 1 수준이었다. 전쟁이 발발한 이후 제조업이 급속도로 회복되었다. 1950년 말엔 전전(戰前)의 94%, 1951년엔 128%, 1953년엔 171%로 향상되었다. 제조업 종사자들의 임금 지수도 1950년 59.5(1960년을 100으로 보았을 때), 1951년에 65.6, 1952년에 73.5, 1953년에 77.4로 급등하였다.
  
  
   유엔군의 피값
  
   수출액은 1949년의 5억 1000만 달러에서 1951년엔 14억 달러로 늘었다. 수입은 1949년의 9억 500만 달러에서 1952년엔 20억 달러로 증가하였다. 도쿄 증권시장도 활성화되었다. 1950년 6월의 일간 거래액은 9470만 엔이었다. 1953년 2월엔 24억 엔으로 급증하였다. 1951년 초 요시다 수상은 의회에서 연설하면서 ‘최근 일본은 경제 회복과 부흥을 향하여 괄목할 만한 진전을 보이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한국전 기간에 재벌기업에 대한 규제도 완화되었고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규제는 강화되었다. 일본의 고도성장 노선은 한국전 시기에 그 틀이 잡힌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1952년 한국 해역에 평화선을 그었다고 미워하는 일본인이 많지만 그 이승만의 결사항전(決死抗戰)으로 한국이 자유의 방파제가 됨으로써 일본의 고도성장이 가능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오늘 일본인들이 누리는 번영과 평화는 한미군(韓美軍)을 포함한 유엔군 파병 16개국 군인들이 흘린 피의 덕분이기도 하다.   



   

등록일 : 2018-07-27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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