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사람들은 지금도 신상옥, 최은희를 남한을 탈출한 월북자로 알고 있다. 김정일에 의해 납치당한 사람들이라고는 꿈에도 모른다. 나도 당연히 몰랐다. 그들이 남조선이 싫어서 제 발로 걸어 들어왔다고 선전하니 그런 줄 알았다. 그들은 영화로 북한 내를 떠들썩하게 하더니 어느 날 달아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북한강연회에서는 “신상옥, 최은희는 한국에서도 원래 쓰레기들인데 우리가 품어서 사람 만들어준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자들이다. 당의 신임도 저버리고 돈에 현혹되어 당 자금까지 걷어가지고 달아났다(그때 엄청난 돈을 가지고 도망갔다고 했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살던 자들은 원래 돈밖에 모르는 파렴치한 자들이다. 대남(對南) 공작대가 따라 나섰으니 당장 모가지를 비틀어 가지고 올 거다. 지금 그들은 어느 순간에 죽을지 몰라 밤잠을 못 잘 거다”는 등 온갖 비난을 다했다.

후에 사람들 사이에서 “신상옥, 최은희는 자기들이 살아온 세상과 전혀 다른 북한생활에 적응하기 힘들어 달아났다”는 말들이 떠돌았다. 일상이 자유롭지 못한 데다 그들은 남한식의 영화공법을 주장하고 김정일은 사회주의 주체예술을 주장하는 대립 속에서 서로 의견이 맞지 않고 어느 땐가는 정치범으로 몰려 죽을까봐 달아났다는 말들이 떠돌았다. 사람들은 그 말을 하면서 북한과 다르게 자유롭게 사는 자본주의에 대해 동경도 하고는 했다. 
 
몇 달 후, 드디어 “신상옥, 최은희의 모가지를 따왔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북한은 배신하고 외국으로 달아난 사람들을 반역자로 규정하고 그들을 따라가서 처단한다는 말을 ‘모가지를 딴다’든가, 혹은 ‘비튼다’든가 하는 비문화적인 어휘를 사용한다. 북한정권은 이미 자국 내 인민들에게 “북한은 세계에서 어느 나라도 따라올 수 없는 테러 왕국이다, 누구든 달아나면 기어코 따라가서 잡아 죽인다”고 공포심을 심어주었다. 신상옥, 최은희는 영화기술이 대단한 자들이지만 이미 사상이 변질되었기 때문에 잡아서 데려올 필요도 없어 그 자리에서 쏴 죽였다고 했다. 나는 북한에 있을 때 황장엽도 대남 공작대가 나가서 모가지를 땄다고 선전해서 그런 줄로 알았다.

북한에서 ‘신필림’ 영화라면 신세대를 내놓고는 모르는 사람들이 없다. 아직도 그 여운이 대단하다. 신필림 영화들이 기억에 삼삼하다. 제일 남는 것은 ‘돌아오지 않는 밀사’ ‘불가사리’ ‘소금’ ‘홍길동’ ‘사랑 사랑 내 사랑’ ‘탈출기’ ‘철길을 따라서 천만리’ 등이다. 이 중에서도 제일 기억에 남은 것은 ‘철길을 따라서 천만리’라는 영화다. 영화 상영 당시 나는 이 영화를 두 번 보았다. 북한에서 최초로 키스신을 만들어낸 영화이다. 남녀가 손도 못 잡고 다니는 곳에서 키스신은 인민들 속에서 완전히 딴 세상의 모습을 보여준 파격적인 것이었다. 더 중요하게는 주인공 여자가 일본 남자의 유혹에 걸려들어 하룻밤을 보내고 다른 남자도 아니고 전쟁영웅인 공화국 영웅을 사랑해서 결혼까지 한다는 것은 북한사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이중 연애도 아니고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일본 남자에게 한 번 몸을 더럽힌 여자를 공화국 영웅인 남자의 품에 새롭게 안기게 한다는 것은 영화를 보는 우리의 눈에 완전히 딴 세상의 것을 보여주었다.

영화에서 여성의 도덕성을 따져보면 사회주의 문학예술에서는 배제되어야 할 형상이다. 또한 그런 여인이 공화국 영웅과 결혼해서 행복한 삶을 보낸다는 것도 성분제도와 맞지 않는 형상이다. 신상옥은 이 같은 신성불가침 같은 북한의 사상성과 여성성을 무시해버리고 사회주의 예술에 새로운 인간의 견지를 대담하게 실천해 버렸다. 신상옥이 만든 영화들에는 ‘당’이라는 말은 조금 들어가도 직접적으로 ‘수령님’이요, ‘장군님’이요 하고 숭상하는 언어들은 일체 배제 시켰다.

그때 영화를 보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돌아가는 말들은 김정일을 비롯한 중앙당간부들이 보는 영화와 일반 백성이 보는 영화가 다르다고 했다. 키스신보다 더한 생활적인 부분들이 있어서 일반적인 백성들이 보면 자본주의 황색바람에 물이 든다고 김정은이 잘라내라고 지시했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신필림은 우리가 보지 못한 영화들도 여러 편 더 찍었는데 그것은 김정일 같은 사람들만 볼 수 있는 것으로서 우리에게는 보여주지 않는다는 말도 돌았다.

나는 지금도 신필림 영화를 보겠다고 영화관 주변으로 무너질 듯이 모여왔던 관람객들이 떠오른다. 군 안에 영화관이 3개였다. 필름이 한 개밖에 없어서 3개의 영화관에서 시간 차이의 간격으로 달구지에 실어서 오르내리였다. 이 영화관에 사람사태가 나면 저 영화관으로 들고 뛰던 생각이 난다. 영화관 주변이 사람사태가 날 지경이었다. 영화관 문이 부서질까봐 한 10미터 선에서부터 살창을 만들어 한 사람씩 빠져나오게 하고 문지기가 몇 사람씩 나와 섰다. 힘이 센 남자들은 살창 위로 날아올라서 들어가고 우리 같은 여자들은 계속 밀려서 남자들이 다 들어간 다음에 맨 마지막에 들어가곤 했다. 영화관은 좌석표가 아니고 들어가는 순서대로 앉았다. 영화표는 예매수와 상관없이 마구 팔아버렸다. 객석에 사람이 꽉 차고 사람들이 다니는 길도 꽉 메여서 비집고 들어설 자리가 없다. 제일 뒤에서 서서 화면 전면을 볼 수 없어서 언뜻 언뜻 비치는 조각그림 같은 화면을 보며 안타까워하던 기억이 삼삼하다.

신상옥, 최은희가 북한 영화에 기여한 공적은 대단하다. 그때부터 북한 영화는 촌티 나는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자 북한 영화는 다시 무너지기 시작했다. 돈도 없고 선전에만 매달리는 북한 영화에 인민들은 스스로 환멸을 느끼고 거부하고 있다. 더욱이 중국에서 녹화기가 들어오고 나서부터 한국 영화, 외국 영화 바람이 불어치고 있다. 일 년에 한 번 내지 두 번 정도 명절공급으로 주는 전기 공급이 되는 날도 문을 닫아걸고 녹화기로 외국 영화를 보고 있다. 북한에서 독재가 사라지고 세상이 환히 열리는 날, 북한인민들은 자기들이 모르는 이 기막힌 이야기들을 듣고 뼈저린 세상을 다시 돌아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