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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7월 26일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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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할 수 있는 것과 용서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적의 공격으로 인해 감당하기 힘들 만큼의 비극을 겪어야 했던 자들을 국가가 외면한다면 그 누가 기꺼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자 하겠는가”
3월26일은 북한 김정은에 의해 기획되고 김격식(2015. 5.10사망, 북한군 대장) 에 의해 자행된 우리 해군 천안함이 피격, 40명 전사, 6명 실종이란 최대의 아픔을 겪은 날로 피격 7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날을 기리고 서해바다를 사수하다 전사한 장병들을 추모하기 위해 정부는 3월 넷째주 금요일을 ‘서해수호의 날’로 정해 정부 주관 기념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이 글은 3월22일 백승주 국회의원과 (사)호국보훈협회 등이 국회의원회관에서 개최한 ‘제2회 서해수호의 날’ 호국보훈세미나에서 2010년 3월 천안함 피격 당시 승조원으로 서해바다를 지키다 극적으로 생존한 김윤일 예비역 병장이 세미나에 토론자로 참석 밝힌 토론문 내용이다.<편집자 주>
김윤일 / (예) 병장, 2010년 3월 천안함 참전 

중국 춘추시대 초(楚)의 오자서는 나라의 후계자 다툼에 휘말려 초 평왕에게 아버지와 형을 잃고 달아났다. 정(鄭)을 거쳐 오(吳)에 정착한 오자서는 그곳의 재상이 되어 정권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아직 완전한 강국이 아니었던 오를 도와 국력을 비축한 후, 오자서는 오군의 지휘관이 되어 초를 공격했다. 초는 채 몇 달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고, 오자서는 복수를 눈앞에 두었다.


 그러나 오자서의 아버지와 형을 참살한 초 평왕은 세상을 떠난 후였다. 원한에 사무친 오자서는 초 평왕의 무덤을 찾아갔고, 무덤을 파헤쳐 그 시신을 꺼냈다. 마침내 원수의 시신과 마주한 오자서는 구리 채찍으로 시신을 수백 대 내려쳐 그 형체도 찾기 힘들 정도가 된 후에야 채찍을 거두었다고 한다. 이것이 저 유명한 굴묘편시(堀墓鞭屍)의 고사이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철절히 중립을 고수하던 미국은 독일의 잠수함 공격에 자국의 민간인들이 두 차례나 희생되자 독일 제국에 선전포고했다.


 2001년 알 카에다는 미국에 9.11 테러를 감행했다.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은 그 복수의 과정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적의 공격으로 생명이 경각에 달렸던 경험이 있으며, 마흔 여섯 명의 전우들을 그야말로 한순간에 떠나보내야 했던 경험도 있다. 살아남은 자인 필자가 전사한 전우들을 묻고 나서 가장 간절했던 것은 복수였다.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당시 함께 경비 중이던 속초함이 모종의 표적을 향해 격파 사격을 감행했다고 들었다. 그 표적이 새 떼건 물고기 떼건, 귀신이건 구름이건 필자에게는 전혀 문제되는 일이 아니었다. 한 차례라도 우리 전우들을 대신해 사격해 준 속초함 전우들에게 감사할 뿐이었다. 5월24일 적국에 내려진 선포도 다소나마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적을 향한 실제적인 반격은 우리와 같은 슬픈 자들이 늘어나는 원일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군 생활을 이어나가는 동안, 다만 한 차례라도 저 우악스럽고 잔인무도한 적국에 천벌이 내리기를 간절히 바랐다. 항상 레이더로 보아왔던 적함의 쇳덩이에 벼락이라도 내리꽂히기를, 군량이 모자라 자국의 어선들을 노략질하는 야만스러운 적군의 얼굴이 백짓장처럼 창백해지기를 원했다. 단 한번이라도 우리가 겪었던 것처럼 시커멓게 출렁이는 바다 위에서 양 손으로 주위를 더듬으며 보이는 전우의 손을 부여잡고 보이지 않는 전우를 찾아 헤매기를 기도했다. 그리고 기도의 결과로, 벼락은 11월 연평도에 내렸다.


 복수를 꿈꾸고는 있었지만 막상 복수의 대상부터 난감하기 짝이 없다. 모든 정황과 모든 근거와 모든 증거가 민주주의적 절차와 적장자 상속의 유교적 예법을 모조리 짓뭉개며 득의양양하게 새로 즉위한 젊은 왕을 가리키고 있다. 우리가 목숨을 바쳐 지킨 이 나라의 국민들은, 저 잔인하고 난폭하지만 미숙한 왕과 그 수족들을 향해 함께 손가락질하며 규탄해 줄 것임을 믿었다. 그런데 이 위대하고 아름다운 민주국가는 모든 국민이 한 목소리로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자들을 위해 분노해 주지 않는 것이 마치 민주주의의 당연한 권리라도 되는 양 그것을 외면했다.


 민주주의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해 전우들의 목숨을 앗아간 원흉은 수십년 동안 웅크려 있다가 그 때 단 한번 눈을 떠 스스로 회광반조(回光返照 ․ 사람이 죽기 직전에 잠시 온전한 정신이 돌아오는 것)의 생명력을 빛내며 기폭한 기뢰가 되었다.


 수백 수천번을 왕복하는 동안 몸을 숨기고 있다가 오로지 그 순간 대한민국 해군을 향한 적개심을 드러내며 힘차게 돌출한 바다 밑의 괴암초가 되었다. 함(艦)내 가혹행위에 못 이겨 앙심을 품은 나머지 자살테러를 감행한 전우가 우리의 원수가 되기도 했다.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한국군과 연합훈련을 진행하던 미군이 믿을 수 없는 정확도와 은밀성과 기동력으로 우방국의 전함을 성공적으로 침몰시킨 장본인이 되었다.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기독교인이 대통령인 나라에 종교적인지 정치적인지 모를 적개심을 품고 결사적으로 돌진해 왔다는 이스라엘 잠수함이 우리의 비극을 만들어 낸 연출자 후보에 오른 일이었다.


 민주주의 질서를 수호하는 데 여념이 없는 자들은 그렇게 국가의 주적에게 이 비극의 혐의가 집중되는 것만을 필사적으로 막아댔다. 그들이 소리 높여 외쳤던 것은 ‘상식’이었다. 사악한 미국 자본주의를 추종하는 세력의 발표에 따라 우리의 집이 어뢰의 공격에 적중한 것이 맞다면, ‘상식적으로’ 배 안의 형광등 등 모든 물건이 멀쩡할 리가 없다는 말, ‘상식적으로’ 살아남은 ‘패잔병’들이 멀쩡하게 자기 발로 걸어다닐 수 있를 리가 없다는 말, ‘상식적으로’ 시신이 모두 훼손되어 알아볼 수도 없어야 한다는 말 등.


 글을 쓰는 지금 다시금 돌이켜 봐도 절로 모골이 송연한 주장들 투성이었다. ‘상식적으로’ 휴전 중인 국가의 주적은 그들의 보호 안에 있었다.


 우리를 공격한 북한의 군인들은 명령을 따른 것이 분명하다. 군인의 본령은 국가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다. 직접적인 지시를 내린 상부가 아닌, 실제로 공격을 시행한 군인들이 우리에 대해 극렬한 적개심이나 전의를 불태웠을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반대의 경우라도 당연한 일이다. 당연히 복수심의 대상은 대한민국 일부 국민들에 의해 희미해져 버렸다.


 필자의 적개심은 오히려 우리의 숭고한 희생을 어떻게든 깍아내리고 백안시하기에 안달이 난 위대한 일부 민주주의 국민들에게로 향했다.


 전우들이 한 사람 한 사람 녹슨 배에서 올라와 우리 곁으로 올 때, 우리는 그들을 싣고 오는 헬기 소리만 들어도 공포에 떨었고 비탄에 잠겼다. 화면에서 전사자들의 신원이 하나하나 밝혀질 때마다, 제발 저들이 고통 없이 즉사했기만을 바라던 참담하고 끔찍한 하루하루를 절대 잊을 수 없다. 건장했던 남자들이 한 아름에 불과한 유골함 안에 수습된 모습을 보며 우리가 감내해야 했던 슬픔은 감히 몇 줄 글로 묘사할 수조차 없다. 그들을 엄숙하게 떠나보낼 수 있었던 영결식 때까지, 그 위대한 일부 국민들을 제외한 많은 국민들은 우리의 슬픔에 함께 동참해 주었고, 함께 분노해 주었고, 함께 눈물을 흘려주었다. 다시 한 번 그 때의 국민들, 진실로 숭고하고 아름다웠던 국민들께 깊이 감사드리고 싶다.


 기실 필자가 품었던 치기어린 복수심은 허황되고 터무니없고 실현돼서는 안 되는 감정임이 분명하다.


  첫째로 필자를 포함한 참전 전우들이 아무런 힘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로 실제로 우리를 공격한 적들은 어쩌면 우리와 전혀 다르지 않은, 비록 적일지언정 그저 국가의 명령을 수행했을 뿐인 군인들이기 때문이다.


  셋째로 아마도 가장 큰 이유가 되는 것은, 우리와 같은 슬픔을 겪는 사람들이 전쟁으로 인해 늘어나는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아마 먼저 간 영웅들도, 살아남은 전우들도 모두 이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우리가 행해야 할 가장 바람직한 복수는 적의 공격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간자와 남은 자들이 하나같이 나라의 환대를 받으며 굳건히 뭉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혹자는 경계에 실패한 군인 운운하며 국가의 위상과 전사한 군인들의 희생을 한가지로 폄하하려고 아직까지도 애를 쓰고 있다. 만약 우리의 희생으로 국가가 하나로 뭉쳐 적에 대한 경계심과 방어 체계를 더 강력하게 다진다면, 우리는 절대로 경계에 실패한 초병이 될 수 없다. 그것은 피해는 있을지언정 성공적인 경계이다. 만약 우리가 실패한 초병이라면 그 허물어진 경비 이후에 추가적으로 발생한 국가적 피해가 있는지, 다시 말해 우리의 피격이 국가에 해를 끼치는 시발점이 되었는지 묻고 싶다.


 그 후로 일곱 해가 지났건만, 아무래도 아직 우리는 성공한 초병이 되지 못한 모양이다. 국민들의 무관심과 냉대에 불만을 표할 의향은 전혀 없다. 아무리 큰 슬픔이라도 언젠가는 극복되어야 한다. 아무리 잊지 못할 일이라도 언젠가는 잊히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우리의 희생을 발판삼아 해군을 포함한 국군의 방위 시스템이 더 견고해지고 더 정교해진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어느덧 십 년을 바라보고 있는데도 타인들에게 하루하루 죽을 때까지 절대 잊지 말아 달라며 슬픔과 적의를 강요할 수는 없다. 그것은 옳지 않다.


 적국의 군인들과 수뇌부는 용서할 수 있다. 이미 지나간 일이다. 그들의 목을 모조리 베어 백령도 앞바다에 집어던지며 전우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싶은 마음은 하늘에 닿아 있지만, 그런다고 그들이 살아 돌아오지는 못한다.


 온 힘을 다해 우리를 패잔병으로 규정하고 살아남은 장병들을 각각 영창과 교도소에 집어넣어 평생 죗값을 치러야 한다며 아우성치는 몇몇 국민들도 용서할 수 있다. 그들의 생각이 어떻든 간에, 그들은 우리를 직접 만나면 결코 그런 말을 면전에서 할 수 없다. 이 나라는 자유로운 국가이고, 그들은 또한 그런 생각을 할 자유가 있다. 필자는 그들의 주장과 의견을 존중할 수 있다. 다만 어떤 경험은 직접 겪지 못하고 함부로 떠들 수는 없다는 말을 전할 뿐이다.


 천안함 사건은 정부의 정치적 음모의 산물일 뿐이며, 생존한 자들은 한 몫씩 두둑하게 챙긴 이후 입을 씻고 진실을 은폐한다고 주장하는 음모론자들도 용서할 수 있다. 그들이 입을 모아 외치는 ‘진실’이라는 것은, 실제로 세상에 존재하는 진실과는 제법 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그들의 망상과 환영에 부합하는 환상적인 내용에 불과하다. 필자는 이미 그들의 망상에 맞아떨어지지 않는 모든 것을 배제하고 배척하는 모습을 신물 나도록 보아 왔다. 우리의 PTSD보다는 그들의 편집증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의료 지원이 시급하다.


 불경스럽기 짝이 없게도 감히 먼저 간 전우들을 조금씩 조금씩 잊어나는 우리들도 용서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망각은 인간에게 내려진 특권이며, 전우들도 우리가 평생 그 날에 매달려 살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라 자위해 보지만 하루하루 옅어져 가는 기억이 원망스러울 뿐이다.


 서해의 영령들이시여, 부디 이 처절한 자기혐오를 가련히 여겨 주사이다.


 다만 용서할 수 없는 것은 참전자들에 대한 그 어떤 관심과 대책도 제공하지 않는 대한민국 입법부와 행정부의 행태일 뿐이다. 삼권 분립이라는 근대 국가의 기조를 심신을 바쳐 실행하려는지, 반드시 필요한 행동조차 서로에게 떠넘기려는 것은 아닌지 의심될 지경이다. 언감생심 전사한 영웅들과, 지금까지 가장 큰 슬픔을 끌어안고 계실 유가족 분들과 같은 대우를 바랄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순간 비겁하지만 합리화의 논리를 잠깐 빌려 보고자 한다. 휴전국이자 징병제 국가이며 온갖 강대국들로 둘러싸인 이 나라에서, 자의건 타의건 나라를 지키는 중 적의 공격으로 인해 감당하기 힘들 만큼의 비극을 겪어야 했던 자들을 국가가 외면한다면 그 누가 기꺼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자 하겠는가. 국민들의 의식이 모두 하나로 모이는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그것은 허상이다. 단지 작게는 천안함 참전 장병들에 대한 예우를 요구함이며, 크게는 삼군을 통틀어 적에 의한 피해를 경험한 모든 장병들에 대한 합당한 보상과 예우를 원함이다. 더 이상 군인의 희생이 폄훼되어서는 안 된다.


 목숨만 건져 돌아온 주제에 뻔뻔하게 대거리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당당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konas)


김윤일 / (예) 병장, 2010년 3월 천안함 참전






등록일 : 2017-03-27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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