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화(鄭義和) 국회의장이 17일 제67회 제헌절(制憲節) 경축사를 통하여 북한 최고인민회의를 대상으로 하여 “남북 국회의장 회담”을 제안한 것은 법적으로 그에게 허용된 권한을 크게 일탈하는 정치행위로 정치권은 물론 언론에서도 이에 대한 시비가 일어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다.

국회에서 의장이 할 수 있는 정치행위는 헌법과 국회법 등 관련 법규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함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남북 국회의장 회담”을 개최하는 것은 물론 제안하는 것 같은 중요한 국사행위(國事行爲)는 국회본회의 의결이나 아니면 여▪야당 간의 합의를 통하여 그 같은 행위에 대한 권한의 위임이 있어야 하는 일이다. 국내적으로 “남북 국회의장 회담”을 개최하는 문제를 단순히 거론하는 것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를 북측에 대해 “공식으로 제안”하는 행위는 국회의 권한 위임이 없이 국회의장이 자의(恣意)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데 의문의 여지가 없다.

정 의장은 경축사에서 비단 단순한 “국회의장 회담”뿐 아니라 “남북 국회회담”과 “당국간 회담”까지도 언급하고 있다. “남북 국회회담”은 이를 거론하기에 앞서서 과연 북한의 ‘최고인민회의’가 조직과 기능 면에서 대한민국 국회의 상대역이 될 수 있는가를 검토할 필요가 없지 않다. 그와 함께 북한의 ‘최고인민회의’가 전원일치의 단결성을 그 특징으로 하는 반면 대한민국 국회는 구성면에서 여야의 극한적 대결구도 속에서 이른바 “다양성”이라는 이름 아래 심지어 ‘종북(從北)’ 성향의 인적 요소마저 배제할 수 없는 상황 하에서 ‘남북동수’로 구성되는 소위 ‘국회회담’에서 과연 어떠한 문제에 관한 생산적 논의가 가능할 것인지에 대한 검증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그런가 하면 17일 정 의장의 제헌절 경축사 발언 중 “우리 헌법이 지향하는 최종, 최고의 목표는 평화적인 통일”이라는 대목도 결코 그냥 들어 넘길 수 없는 문제 발언이다. 이날 ‘제헌절 경축사’에서 정 의장이 제시한 ‘통일관’은 내용면에서 대한민국 헌법의 명문 조항에 정면으로 도전(挑戰)하는 반헌법적(反憲法的) 발상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의혹을 불식하기 어렵다는 데서 문제가 있어 보인다.

대한민국 헌법은 제4조에서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한다”면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통일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 조항에 의거하면, 대한민국이 추구하는 목표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충족시키는 통일이지 “평화통일”이 아니다. 우리 헌법이 말하는 “평화통일”은 목표가 아니라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충족시키는 통일을 추진하는 ‘방법’에 불과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 의장은 여기서 본말(本末)을 전도(顚倒)하고 있다. 정 의장은 이어서 “남북이 서로를 인정하는 가운데 끊임없이 소통하고 교류함으로써 신뢰를 쌓고, 그 신뢰의 토대 위에 남과 북의 주민들이 함께 통일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면서 “이것이 바로 ‘합의통일’”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정 의장 경축사의 이 대목 또한 중대한 어폐(語弊)를 함유하고 있다.

이에 관해서는 1989년부터 1990년에 걸쳐서 전개된 독일의 통일 과정이 우리에게 타산지석(他山之石)이 된다. 내파(內破)의 위기에 몰린 동독(東獨)은 1989년 중반부터 헬무트 콜(Helmut Kohl) 수상이 이끄는 서독(西獨)을 상대로 ‘협상’에 의한 ‘합의 통일’을 집요하게 간청했다. 그러나, 이 같은 동독의 ‘합의 통일’ 간청에 대한 서독의 대답은 단호한 거부였다. 그 대신 콜 수상의 서독은 동독에게 ‘합의 통일’의 ‘선행 조건’을 제시했다. “우선 동독의 민주화”를 요구한 것이다.

결국 동독은 이 같은 서독의 요구에 굴복하여 1990년3월 동독 역사 상 처음으로 다당제(多黨制)에 의한 자유민주 총선거를 실시했고 이를 통해 공산당이 한 자리 수자의 지지를 얻는데 그친데 반하여 서독 기민당의 짝퉁 정당이 90%에 가까운 득표를 하여 반공주의자인 로타 디 메지에르(Lotha de Maziere)가 이끄는 반공 정부가 수립되자 이를 상대로 협상을 통한 합의 통일을 이룩한 것이다.

정 의장은 그가 말한 “남북이 서로를 인정하는 가운데 끊임없이 소통하고 교류함으로써 신뢰를 쌓는 것”은 분단 체제 하에서의 분단 관리 과정을 말하는 것인데 이것을 ‘통일 과정’으로 혼동(混同)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독일의 경우를 타산지석으로 삼는다면 남북간에는 정 의장이 말하는 “분단 관리”를 통하여 쌓여지는 ‘신뢰’의 토대 위에서 “합의 통일”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같은 “분단 관리”의 과정을 통하여 “북한의 민주화”가 이루어질 때라야 “합의 통일”이 가능해 지는 것이다.

따라서, 이번 제헌절 경축사에 정 의장이 담았어야 할 통일 메시지는 따로 있었다. 반헌법적인 “평화통일”을 절대화 할 것이 아니라 1987년6월 동서 베를린을 가르는 브란덴부르크(Brandensburg) 문 앞에서 로날드 레이건(Ronald Reagan) 미국 대통령이 미하일 고르바체프(Mikhail Gorbachev) 소련 공산당 서기장을 향해 “베를린 장벽을 허물라”고 요구했던 것이나 1989년11월 콜 서독 수상이 10개 항목 독일 통일방안을 제안하면서 그 ‘선행조건’으로 “동독의 민주화”를 요구했던 것처럼 “평화통일의 전제조건”으로 “북한의 민주화”을 요구하는 것이라야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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