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이면 야릇하고 아득하고 묘한 향수가 가슴속에 차오르는 것은 나만의 느낌일까. 사람들은 이 풍요롭고 아름다운 계절이 한때라는 것을, 어느 날 갑자기 떠나버린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을까.
새들도 서둘러 가는 계절이 아쉬운 듯 목청을 높이고 나무는 나무대로 푸른 잎 새와 아쉬운 이별을 고하는 듯하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차안, 스피커에서 울려나오는 가수 이동원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울린다. 누군가 나를 찾아 줄 것만 같은 아까운 계절이다.
이 충만한 10월에 나는 매번 아름다운 詩’月에 묻혀 출근길을 달린다.
남쪽에서 맞는 가을은 그렇게 다섯 번 지났다. 그리고 나는 두 번 회사를 옮겼다.
처음 회사에 입사했을 때, 나는 곧 회사와 직업이 나의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여긴 아니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고 차츰 그것을 ‘확신’하면서 세월을 보냈다
그리고 매일같이 더더욱 “아니다”고 자신에게 외쳐댔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그 “아니다”는 차츰 힘이 빠져갔고 아쉬움과 어울려갔다.
어찌 얻은 회사인데, 어떻게 얻은 직업인데! 하는 속삭임은 아쉬움으로 바뀌었고, 그렇게 세월은 빠르게 흘러갔다.
* * *
5 년 전...한국에 입국한지 두 해가 접어들던 10월의 어느 날, 나는 소설 “인간이고 싶다” 를 탈고했다.
원고와 함께 무려 다섯 곳에 프로필과 자기소개서를 보냈다. 가까스로 계약하여 출판에 넘기니 출판사의 요구 또한 생소했다.
출판사는 간단하기 그지없는 나의 프로필을 놓고 충고에 충고를 거듭했다.
북한이 떠올랐다. 그곳에서 자기소개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국가에 체크된 작가면 그만, 개인적인 우상화를 절대로 참지 못하는 요상한 정권이기 때문이다.
책표지 한쪽 귀퉁이에 “집체작”이라고 밝히거나 개인작인 경우 작가이름만 달랑 써 넣으면 그만이다. 당에서 출판하라고 하면 만사가 오케이고 그럴 경우 출판계약도 복잡하지 않다.
그렇게 단순 명료한 곳에서 살아온 고로 이곳 남쪽에서의 생활은 참으로 복잡해보이고, 난감할 때가 많다. 자신의 책에 대한 홍보는 더 난감하다.
‘수령과 당에 드리는’ ‘봉사문학’의 산지에서 작가로 살아온 나에게 ‘자유문학’은 하늘이 내린 ‘선물’임에 분명하지만 스스로 홍보하고 설명해야 하는 현실은 ‘부담’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김혜숙 지음’만으로 책을 내 달라고 우겨댔지만 끝내 먹히질 않았다. 그래서 북한의 경력까지를 써 넣어야 했고 ‘유명인의 추천서’도 첨부하고야 말았다.
* * *
위에서 언급된 ‘첫 회사’는 이름 하여 ‘소설’을 탈고한 뒤에 뛰어들었던 ‘생활전선’으로, 이곳 대한민국에선 글을 써서 먹고산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성’과 ‘취향’을 들먹이며 ‘첫 회사’를 놓아버렸고 마시 ‘먹고살기 위해’ 직장을 구해야 하는 절박함과 마주섰다.
강연과 투고, 방송출연 등으로 ‘수입은 있었으나’ 그것이 안정적인 생활과 연계되지 않는다는 또 다른 ‘진리’를 체감했기 때문이다.
취업을 위해 헬 수 없이 많은 곳에 자기소개서와 이력서를 보냈다. 인터넷은 물론 아는 인맥을 총 동원해 전화를 넣었고 메일을 보내느라 밤을 패곤 했다.
한편으론 대한민국 국민들은 생의 절반을 자기소개서를 쓰면서 살겠구나~싶어지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전화가 걸려왔다. “김혜숙 씨인가요? 우리 회사에서 선생을 가족처럼 모시려고 합니다. 다만 공공기관인고로 시험은 보셔야 합니다”
“당연히 그래야겠지요”
“서류전형, 필기시험, 면접시험 날자가 공지사항에 나와 있습니다.”
요약하면 두루 이런 내용이었다.
이후 나의 입사지원 서류는 회사 인사과장의 컴퓨터에 등록되었고...나에겐 또 한 번의 출근기회가 주어졌다!
* * *
우리 탈북민 다수는 혈혈단신으로 대한민국에 입국한다. 까닭에 지연도 혈연도 학연도 없다. 때문에 특채도 없고 낙하산 따위는 더더욱 생각하기 어려운 형국이다.
그래도 기회는! 쌓여 있는 곳이 대한민국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북에서 작가로 살아온 내가 전문분야도 아닌 곳에 취직을 했고, 그것도 시험 등을 통과해 합격을 했으니 내가 그 증인이다고 말하고 싶다.
그렇게 나는, 그리고 우리 탈북민들이 한국인이 되어가고 있다.
학원에서 만났던 어느 탈북여성은 200:1의 경쟁을 뚫고 회사원이 되었고 한 탈북선배는 무려 100여 곳에 이력서, 자기소개서를 내고 취직했다고 늘 자랑이다.
주변 탈북민 가운덴 무려 열한번이나 직업교육을 받고 자격증도 10개나 가지고 있다는 슈퍼맨도 있고 중국어와 일본어,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몇 개국 가이드로 일하는 사람도 있다.
이제 나는 그 가운데 작은 한사람임을 자부하고 있으며 그렇게 작은 내가 모여서 큰 ‘우리’가 됨을 깨닫고 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도 경력과 이력 등에 자신 없는 날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를 탈북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부딪쳐 보시라. 그리고 도전해 보시라”
* * *
나는 오늘도 낭만으로 가득한 詩’月을 달린다. 이제 사직서를 내면 절대로,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는다는 믿음을 달린다.
이제 반백의 나이에, 이곳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일을 ‘발견 해 낸’ 자신이 조금 쑥스럽기는 하지만 다시 사는 인생이 고마울 뿐이다.
2014.10 김혜숙
김혜숙은 북한 평양연극영화대학 TV방송문학과를 졸업하고 조선중앙방송위원회 학생소년부 작가로 일했으며 탈북 후, 장편소설 '인간이고 싶다'를 통해 소설가로 등단했다. 이후 시, 소설, 수필 50여 편을 탈고했으며 KBS 한민족방송, 극동방송 등 다수 출연, 조선, 중앙, 동아 신문 등에 북한문제에 관한 다수의 글을 기고한 프리랜서 작가이기도 하다.
등록일 : 2014-11-15 (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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