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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30일   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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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李承晩 탄생 135주년 生日
59세 再婚 후에야 생일상, 6.25땐 인절미 몇개
김효선 

떠도는 망명객, 뉴욕서 울면 한그릇 나눠먹고
 <오늘 이승만 135세 생일>독립운동도 굶기 예사
 
 
 1912년 생일날 33년간의 망명길 떠난 이승만
 
 올해 3월 26일은 이승만 박사 탄신 135주년이 되는 날이다.
 
 이씨 가문의 6대 독자로 태어난 이승만 박사는 주위의 많은 사람, 특히 부모와 누님들로부터 금지옥엽(金枝玉葉)으로 사랑받으며 자랐다. 


 아버지 경선공은 보학과 풍수지리에 조예가 깊은 유교적 선비였으나 넉넉한 재산이나 생계수단이 없었다. 양녕대군의 16대손이라고는 하지만 이승만 박사의 집안은 오랫동안 벼슬길이 막혀 몰락한 양반이나 다름없이 빈한했다. 


 당시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학식이 높았던 어머니는 어려운 살림을 꾸려가며 아들의 교육을 위해 전력을 다했다. 아무리 어려운 때라도 어머니는 아들의 생일이면 미역국과 흰쌀밥을 해줬고, 수수팥단지와 튀각을 빠트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승만 박사가 본격적으로 개화·계몽운동에 뛰어든 이후로는 제대로 된 생일상을 받아보지 못했던 것 같다.
 
 ▶굶기 예사였던 망명객, 중국집 알바 최용진씨 찾아 허기 채워
 
 이승만 박사는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사과 한 개로 하루를 견디며 끼니를 거를 때가 많았고, 심지어는 생일에도 굶은 적도 많았다. 


 미국 유학과 독립운동 시절에 몹시 배가 고플 때면, 뉴욕의 어느 중국집에서 일하며 고학하던 독립운동 동지 최용진(崔容鎭) 씨를 찾아가 요기를 하기도 하고, 때로는 둘이 울면 두 그릇을 시켜놓고 생일 파티를 하며 고향집을 그리워했다.
 
 프란체스카 여사와 결혼한 1934년 이후부터는 조촐하나마 생일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것 같다. 


 프란체스카 여사의 회고에 의하면 결혼 후부터는 생일만은 꼭 미역국과 쌀밥, 잡채와 물김치를 차려주었다고 한다.
 
 ▶混食 장려하던 시절 "사진 촬영 말고 간단히"
 
 대통령이 된 후에도 이 박사는 친구나 친척들만 경무대로 초대하는 조촐한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이 박사가 대통령이 된 후 처음 맞았던 생일, 생일상을 차릴만한 마땅한 친척이 없자 비서들이 걱정했다. 그 때 이 대통령의 몇 안 되는 친척 가운데 경무대에 자주 드나들던 외척 누님의 손자 우제하 씨가 이 박사의 생일상을 준비하겠다고 했다.


 대통령은 사양했으나 우제하 씨가 모실 사람도 없으니 자신이 하겠다고 우겨 대통령의 승낙을 받았다. 그러나 쌀이 모자랄 때라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쌀밥만 먹지 말고 보리쌀도 섞어 먹도록 하라"고 혼식을 장려하고 있을 때인지라 프란체스카 여사가 난색을 표했다. 국민들에게는 혼식을 장려하면서 쌀이 주가 되어 차려지는 큰 상을 받을 수 없다고 반대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사진 촬영도 하지 말고 우리끼리만 간단하게 하자는 조건을 전제로 한 프란체스카 여사거 받아들여 생일상이 차려졌다. 비록 하객도 없이 조촐하게 맞은 생일이지만 이 대통령은 퍽 기뻐했다고 한다.
 
 ▶6.25戰亂 중 인절미 나눠먹고 "그 떡 참 맛있네"
 
 프란체스카 여사는 6.25전란이 한창이던 1951년, 부산 임시관저에서 맞은 이 대통령 생일을 잊을 수 없다며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이 대통령은 미역국과 안남미(인도차이나 산 맛없는 쌀) 쌀밥 외에는 단 한 가지도 생신음식을 더 장만해서는 안 된다는 엄명을 내렸고, 생신 선물도 일체 사절했다. 


 당시 많은 전재민들이 굶주리고 있었고, 날마다 처참한 부상병들이 신음하며 후송되어 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대통령과 경남 지사인 양모 지사가 거제도를 비롯하여 남해안 여러 곳을 시찰했을 때 양 지사가 인절미를 가지고 와 배에 탄 대통령과 일행에게 조금씩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한참 후 대통령이 “양 지사, 아까 그 인절미 참 맛있던데. 그 떡 정말 맛있어”하며 넌지시 남은 떡이 있으면 조금 더 내놓으라는 눈치를 보였다고 한다. 


 그러나 남은 떡은 하나도 없었고, 대통령이 실망하는 눈치여서 송구스럽게 생각한 양 지사는 생신날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말라는 엄명이 있었으나 인절미만은 대통령께 드려도 별 탈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가져왔다.’


 76세의 노구를 이끌고 전선을 누비며 승전을 독려했던 노 대통령의 인절미 이야기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잊지 못할 마지막 생일상, 하와이 동지들의 축하연
 
 그후 뭐니 뭐니 해도 1961년 하와이 교민들이 베푼 이 박사의 생신축하연이 프란체스카 여사에게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을 것이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고군분투하며 망명기간 대부분을 보냈던 하와이 평생 동지들이 베푼 생신축하연이었고, 그것이 생전에 건강한 모습으로 맞은 마지막 축하연이 되었으므로…. 다음해 이 박사는 3월17일 귀국길에 나섰으나 마지막 순간에 한국정부의 거부통보를 받고 쓰러지고 말았다. 그후 요양원의 병상에서 망향의 눈물 속에 맞았던 생일이 세번, 1965년 7월19일 만90세 생일이 지난 지 4개월만에 대한민국 建國대통령은 그렇게 눈을 감았다.
 
  
 

등록일 : 2010-03-26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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