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추운 겨울, 10살 난 아들의 손목을 잡고 그것이 탈북인줄도 모른 채 남편을 찾아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그때로부터 벌써 8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그 세월을 돌이키는 감회도 새롭습니다.
집안에서 막내로 태어나 부모님과 언니·오빠들에게서 사랑만 받으며 성장한 나는 중학교와 경제전문학교를 최우등의 성적으로 졸업했고 졸업 후에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좋은 직업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은행 취직과 이름 하여 ‘시집 잘 간’언니들 덕에 느닷없이 들이닥친 90년대의 ‘고난의 행군’시절도 큰 고생 없이 넘겼던 나는 군에서 제대되어 온 남편을 만났고, 중국을 상대로 장사를 하던 남편의 ‘활약’까지 더해져 안정된 삶을 영위해 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며칠간 중국을 다녀오겠다며 남편이 집을 나섰습니다. 아무리 국경지역에서 생활한다고 해도 ‘도강’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어서 걱정이 태산 같던 나에게 남편이 남겼던 말은 “걱정하지 말라”는 그 한 마디었습니다.
그렇게 남편은 이웃집 마실 다녀오듯 집을 떠났고 나는 남편이 돌아올 날 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일주일, 그리고 또 일주일...며칠간 다녀온다는 사람이 한 달이 더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고 불안한 마음에 근심까지 덧쌓여 밥을 먹어도 모래를 씹는 것 같았습니다.
한 달이 지나고 한 달이 더 지나던 어느 날, 뜻밖에 중국에 있다는 남편으로부터 소식이 날아왔습니다. 덮어놓고 “당장 아들을 데리고 중국으로 오라”는 청천병력 같은 소식이었습니다. “왜? 무엇 때문에?!...”
아무런 설명도 없었지만 남편을 하늘처럼 믿고 살아온 환경 때문이랄까, 잠자는 아들애를 들쳐 업다 시피 하고 칠칠야밤에 압록강을 건너던 나는, 순간에도 (다시 돌아갈 때 까지 집에 도둑이 들지 말아야 할 텐데...)하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강가에서 우리 가족을 기다리던 남편이 하던 이야기는 천만 뜻밖의 것이었습니다. “납북자를 데리고 강을 건넜었는데, 그 납북자가 남조선 기자와 인터뷰를 했고, 인터뷰 과정에서 자신이 이름도 나왔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북한보위부가 이런 사실을 아는 건 시간문제고 그 전에 가족을 빼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촌각을 다투던 환경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틀 뒤, 북한으로부터 “무슨 일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너희 집에 보위지도원들이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다. 다시 돌아오면 잡혀갈지도 모르니 돌아올 생각은 하지도 말라”는 친구들로부터의 소식이 날아왔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결혼 후 처음으로 남편에게 화를 내며 따져 물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호탕하고 자존심 넘치던 남편도 그때만큼은 크게 주눅 든 모습으로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
1975년 남한의 강원도 주문진 항에서 ‘천왕호’라는 배를 타고 오징어 잡으려 바다에 나갔던 한 납북자가 있었다고 합니다. 어찌 어찌 하다 알게 된 사람인데, 남조선으로 데려가 달라고 애원하고 또 애원했다는 그 노인을 차마 외면할 수 없어 함께 중국으로 갔었다는 남편이 한없이 원망스럽기만 했습니다.
“그래서요?” 나는 물었고, 남편은 “어쩌겠니? 당분간 중국에서 살면서 저쪽(북한)에서 좀 조용해 질 때를 기다리는 수밖에...”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북한당국에 대한 우리 가족의 철없는 바람이었고 우리는 곳 ‘당장 잡아들이라는 김정일의 친필 지시에 의해 중국공안으로부터도 쫒기는 신세’라는 것을 알아버렸습니다.
당분간 중국에서 숨어 살면서 북한쪽 눈치를 보자던 남편의 꿈은 산산이 깨어졌고 그런 남편의 눈에서 살기 같은 것이 번쩍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어느날 밤 아들이 잠든 틈에 나를 불러 앉히더니 “정숙아, 우리 남조선으로 가자”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갈 테면 당신 혼자서 가. 난 죽어도 안가” 벌써부터 남편의 눈빛에서 그런 이야기를 읽고 있었던 지라 다짜고짜 남편의 이야기를 끊어버렸고 이제 이 사람과도 인연이 다했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남편이 소중하다 해도 북에 남은 부모님과 언니 오빠들을 생각하면 ‘배신의 길’만큼은 갈 수 없다는 게 당시의 제 생각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설사 ‘장군님의 친필 지시'에 의해 내가 죄인이 되는 한이 있어도 가족에게 만큼은 그 죄를 떠넘기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남편은 가자고 했고, 나는 죽어도 못 간다고 하고...중국 공안을 의식하며 소리없이 울고, 발버둥 까지 치던 그 순간들을 죽어도 못 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결국, 9개월간이나 남편의 ‘설득’에 시달리다가 어느 브로커의 안내를 받아 태국을 거쳐 대한민국에 입국하게 되었습니다.
* * *
솔직히 대한민국은 제가 꿈꾸던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저의 남편에게도 지어는 저의 아들에게도 어찌 어찌 하다가 불쑥 뛰어든 ‘타향’이었고 ‘외롭고 낮선 곳’일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영문도 모르고 불쑥 뛰어든 우리 가족을 대한민국정부는, 그리고 이 나라 국민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따뜻이 맞아 주었습니다. 9개월간의 중국 생활과 3개월간의 그 지긋지긋 하던 태국생활을 마쳤다 싶던 순간, 온 몸에 힘이 풀려 인천공항의 어느 벤치에 주저 않아 버렸던 기억이 납니다.
조사기관이란 곳에서 우리 가족이 만났던 최초의 ‘남조선 사람’으로부터 “최 선생, 그리고 김 선생, 참 잘 오셨습니다. 오시느라 정말 고생하셨습니다.”하는 말을 들었을 때는 그만, 울음을 터뜨려버렸습니다. 누구 에게라 없이 쌓였던 설움이 솟구쳐 올랐고 (선생이라니, 내가 선생이라니...)하면서 ‘국적 없이’ 떠돌던 탈북자의 설음을 날려버렸습니다.
...2개월간의 조사, 다시 3개월간의 교육을 마치고 우리가족은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꼭 한 달 만에 남편과 저는 ‘회사원’이 되었습니다. 하는 일은 경광등을 만드는 일이었고 회사는 크게 이름 있는 회사가 아니었지만 ‘일을 해야 먹고 살 수 있다’는 생각이 그 어떤 생각보다 지배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실지로 국가에서 준 정착금을 탈탈 털어도 브로커 비용은 터무니없이 모자랐고, 당장 살림살이를 사 들이고 아들애를 공부시키자고 해도 돈이 필요했습니다. 또 인사도 못 드리고 온 부모 형제들에게 미안한 생각에 일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나마 혈혈단신으로 대한민국에 입국한 다른 탈북자분들에 비해 우리는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있었고 자식이라는 미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8년간 저는 단 하루도 쉬지 않았고, 그 8년간 두고 온 부모 형제들을 잊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저에게 자랑이고 보람이라면 보람이었습니다.
어느날, 휴가를 반납하고 퇴근하는 저에게 직장장님이 다가와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일을 잘 하려면 휴식할 줄도 알아야해”. “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이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휴가도 가고 이곳 대한민국사람들처럼 해외여행도 가면...난 언제 집을 장만하고 고향에 두고 온 시집이며 친정집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을까. 벌써 중학생이 된 아들의 학원비는 어떻게 대며 대학입학 준비는 또 어떻게 할까...
그런 나에게 문화적 환경의 다름과 노동강도 따위는 문제도 아니었습니다. 그 8년간 남보다 먼저 출근해 마당도 쓸고 작업장 정리도 했으며 커피타임 시간에는 선, 후배에 상관없이 웃음과 함께 커피를 ‘배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숙련공이 되고 직급도 올라가 주변사람들이 오히려 저에게 이것저것 도움을 청하기도 합니다. 외롭고 소외되던 주변 환경을 훌쩍 뛰어넘어 이제는 제가 북한에 대한 이야기며, 탈북자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직장동료들에게 들려주기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기뻤던 건 올해 초 우리가족이 새로 지은 아파트에 이사를 가게 된 것이었습니다. 분양받은 집은 아니지만 25평 국민임대아파트에 당첨이 되었고 이곳 대한민국에서의 또 다른 가정환경을 맞보게 된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25평이면 그리 큰집이 아니라지만, 우리가족에겐 고래 등 같은 집이었습니다. 아들에게도 방 한 칸, 남편에게도 방 한 칸...운수 좋게 8평정도의 난간도 달려있는 집이어서 우리 가족이 살아가기엔 너무나 만족스런 집이었습니다.
이사가 끝나던 날, 그리 무뚝뚝하던 남편이 와인 한잔을 권하며 “정숙아, 그동안 믿고 따라줘서 고맙다”고 말했고 저는 저대로 눈물이 나서 얼른 부엌으로 달려가 천장을 멀거니 바라보았습니다. (사는 게 다 그런데요 뭐, 우리 탈북여성들이 다 그렇게 사는데요 뭐...)
그런 눈물과 행복을 준 남편이 고마웠고, 빈손으로 온 우리가족에게 오늘의 행복을 느낄 수 있고, 가꿀 수 있게 해 준 대한민국이 고마워 온 밤을 새우며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여느 때보다 더 밝고 활기찬 모습으로 출근길에 올랐습니다!
* * *
제 이야기만 하다 보니 아들과 남편에게 고맙다는 말을 못한 것 같습니다.
우리 가족이 중국에서 숨어살던 때, 정말이지 숨소리마저 죽여 가며 살아야 했던 그 때 “절대로 밖에 나가지 말라”고 한 아빠의 이야기를 어기고 열 살 난 아들애가 밖으로 나갔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잠시 집을 비웠던 우리 부부가 돌아와 보니 문은 잠겨있었고, 아들애가 보이질 않는 것이었습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우리는 밖으로 달려 나갔고 어두워진 동네 골목길을 샅샅이 뒤지며 애타게 아들애를 찾아 헤맸습니다.
그러던 어느 골목길에서 아들을 만났고...그 열 살 자리 철부지 어린애를 남편은 있는 힘을 다해 손바닥으로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이 녀석아 그렇게 놀고 싶어? 아빠 엄마가 그렇게 걱정하면서 이야기 했는데, 그걸 참지 못해 집밖을 쏘아 다녀?!”
너무 성이나 그 '두려운 세상'에서도 소리를 지르며 숨을 헐떡이는 남편에게서 아들을 빼앗듯 낚아채 가지고 총총히 걸음을 다그치는 저의 등위에서 남편의 가시 돋친 원성이 다시 들려왔습니다. “그따위 녀석 내버려 둬!”
그날 저녁 퉁퉁 부어오른 아들의 볼을 어루만지며 저는 조용히 물었습니다. “영남아, 그렇게 밖에서 놀고 싶었니? 아빠가 우릴 걱정해서 그러는 거지 네가 미워서 그러는 게 아니야. 알지?...”
그러는 저의 손을 꼭 잡고 있던 아들애가 “엄마, 나 사실 놀려갔던 게 아니야” 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엄마, 나 사실...이거 주으려 갔댔어”
그러면서 열 살 잡이 나의 아들이 주머니에게 무엇인가를 꺼내 나의 손바닥에 한 움큼 올려놓는 것이었습니다. (?!...)
손바닥위의 물건을 보는 순간, 저는 그만 흐아~~~하고 울어버렸습니다. 철부지라고만 생각했던 그 어린애가, 담배살 돈이 없어 담배를 피우지 못하는 아빠의 생각을 어떻게 읽었는지, 골목길을 돌아다니며 담배꽁초를 주어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무슨 말을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몰라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울고 또 울었습니다. 하늘이여, 땅이여, 이 무정한 아비를! 어미를! 용서해 주십시오~하며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아들이 이제 어였던 젊은이가 되어 아빠 엄마를 위로하며 대한민국의 청춘을 살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잘 자라준 아들이 고맙고 이런 우리 가족의 삶의 터전이 되어준 대한민국이 다시 또다시 고마울 뿐입니다.
지금까지 저를 정숙이라고 불러주는 남편에게도 감사하다는 말, 전하고 싶습니다.
1978년, 후계자로 데뷔한 김정일이 처음으로 북한주민들에게 얼굴을 알리던 그 때, 저도 정숙이란 이름을 갖고 살던 다른 이들처럼 이름을 바꾸지 않으면 안됐었습니다.
철없던 때였지만, (왜 이름을 바꾸라고 하지? 김일성이나 김정일과 같은 이름을 썼다면 몰라도 본적도 없고 들어본 적도 없는 누구의 생모와 이름이 같다고 해서 아빠 엄마가 지어준 이름을 바꾸라고 하는 건 절대 납득이 되질 않아...)
그런 제 마음을 알아서인지 주변사람들은 모두 예전처럼 저를 “정숙아~”하고 불러주었고, 결혼 후 제 남편도 저의 속마음을 읽었는지 본명을 그대로 불어주었습니다. 그냥 부른 게 아니라 남들이 다 들으라는 식으로 온 동네가 들썩하게 부르곤 했습니다. “정숙아! 야, 김정수~욱!”
그렇게 저를 불러주고 사랑해준 남편이어서 그 모진 길을 따라 예까지 왔나 봅니다. 저는 분명 미신을 믿는 사람이 아니지만 그렇게 저의 이름을 지켜준 남편이어서 나의 행복도 있다고 믿습니다.
“여보, 사랑해요. 정말 고마워요!” 이 이야기로 하고 싶은 다른 이야기를 모두 대신하려 합니다. 감사합니다!
20014년 11월, 정숙으로 불리는 경숙이가.